새전북신문

[생활의 발견] 서화표구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3.07.01 13:44

한 장의 서화가 전시장에 걸리기까지, 혹은 소장자의 손에 건네지기까지 작가의 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주인으로 이름 석자를 당당히 들이대는 작가가 양지의 세계에 위치한다면, 작품에게 집을 지어주는 표구사는 음지에서 작품에 조력하는 존재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 해도 기계로 대량 복제한 것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듯, 서화 표구 역시 기계화의 거센 물살 속에서도 손수 작업으로 지순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아날로그의 영역이다. 서화의 명성만큼이나 전주는 서화의 틀을 짜는 표구의 명성도 대단했다. 전주의 솜씨 좋은 명장 표구사들은 지금도 인사동의 말쑥한 표구사들이 내지 못하는 독특한 맛을 내며 내로라하는 작가를 단골로 두고 있다. 전주시 완산구 전동 전주 중부경찰서 뒷길 표구 골목의 고석산방 주인 김대현씨(58)도 표구에 있어 ‘오리지널 전주’로 인증된 몇 안 남은 명장 중의 한 사람이다. 김대현씨와 표구의 인연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인들 사이에 동양자수 수예품이 인기를 모으고 결혼 예단에 자수병풍이 필수품목이던 시절, 그의 부친은 직공 20여 명을 데리고 자수공방을 열었다. 자수와 표구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로 인사동에 맡기면 원가가 비싸서 기술자를 데려다 표구를 시켰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표구 작업을 보고 자란 그는 72년부터 직접 경영에 나섰고 어느덧 30년 세월이 훌쩍 흘렀다.표구는 서화를 감상하거나 보관하기 위해 꾸미는 장치로 위아래로 늘어뜨리는 족자와 사방을 나무로 짜서 유리를 끼우는 액자, 여러 폭을 연결하는 병풍 등이 있다. 작업은 나무로 틀을 짜는 목공과 서화에 천이나 종이를 잇대는 작업인 표구작업으로 나뉜다. 최근에는 기계족자가 많이 나와 서울 등지에서는 이미 작업의 50% 정도를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기계화된 부분은 나무틀(프레임)을 규격화하고 배접지를 공장에서 생산하는 것. 가격은 싸지만 기계에 의존한 것과 수작업의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근본적인 거리가 있다. 표구에서 가장 핵심작업은 배접이다. 서화 원본을 짱짱하게 받쳐줄 바탕 종이를 붙이는 작업이다. “100호짜리 그림 하나를 배접하려면 짧게는 1시간, 길게는 4시간을 꼬박 서서 작업해야 하지요. 기계는 10초면 해냅니다. 좋은 작품일수록 얼마나 좋은 상태로 오래 보관하느냐가 중요한데 기계로 배접한 것은 한 번 상하면 복구할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 흠이지요. 배접지에 코팅하여 열로 가압하기 때문에 나중에 원화에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상한 먹을 사용한 서화는 배접 과정에서 번져 버린다. 초배지로 초벌하고 갱지나 신문지로 재벌하고 창호지로 세 벌을 하는데 이 때 사용하는 한지도 기계지로 쓰느냐 사람 손으로 뜬 순지를 쓰느냐에 따라 품격이 다르다. 기계지는 순지 보다 세배는 싸기 때문에 이문이 약한 표구작업에서 쉬이 흔들리는 재료이다. 배접이 끝나면 응달에서 바람이 잘 들도록 간격을 유지해가며 건조시키는데 극도의 정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배접의 성패가 표구의 성패가 되곤 한다. 건조 후 천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보통 종이를 덧댄 비단을 쓰고 최근에는 흰 무명천에 황토염색을 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20년전 하석 박원규의 개인전때 김대현씨는 검정색과 곤색의 천을 사용하여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했다. 흰색이나 미색의 고정관념을 깬 파격이었다. 비단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은 각각 치마·저고리로 부른다. 치마와 저고리의 길이가 같을 필요는 없다. 비단에 색을 입히는 것이나 치마·저고리의 길이를 조정하는 작업에서 표구사의 안목과 경륜이 드러난다. 비단을 붙인 후 나무틀과 연결하는 작업이 마지막 단계. 서화 한 점의 표구가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기일은 7∼10일, 병풍은 20일 정도 걸린다. 서울 서단에서도 개성이 강하고 자기관리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하석 박원규는 김대현씨의 단골이다. 지난달 공평아트센터에서 가진 개인전 작품의 절반도 여기서 해갔다. 두 살 아래인 하석과 김대현씨는 예술적 동반자로 서울과 전주라는 거리를 뛰어넘어 교류하고 있다. 하석은 작품마다 표구사와 가격을 밝혀 관람객들에게 표구가 미술품 제작에서 독립된 작업임을 알려준다.박물관의 의뢰로 고서화를 복원할 때 표구사는 외과의사가 된다.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종이가 상하지 않도록, 핀셋으로 집어가며 작업하는데 종이 파편이 날아갈까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몇 시간씩 서서 하는 이 작업을 요즘에는 힘이 달려서 못한다. “표구가 전통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요. 작품을 돋보이게 하는 작업이니까요. 서예와 그림의 변화에 걸맞도록 표구도 변해야지요.”그의 전향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표구업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직종이다. 현재 전주에는 30여 군데의 표구사가 남았다. 인건비를 건질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기술자 없이 경영자가 직접 작업을 한다. 지금도 걸작을 만나면 등이 뻣뻣해지도록 긴장하는 표구사의 삶이 황혼에 있듯 표구업도 황혼의 문에 기대어 있다./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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