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 이슈] 전북출신 문인들의 친일논란
[이슈 & 이슈] 전북출신 문인들의 친일논란
  • 새전북신문
  • 승인 2003.08.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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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꼭 1년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선배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문인들의 선언이 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계간 실천문학 등이 중심이 된 이들은 친일문학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하는 침통한 뉴스를 전했다. 문단의 친일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날의 선언이 관심을 모은 것은 42명의 문인을 엄선(?)하여 발표함으로써 그간 분분하게 진행돼온 친일문학인의 범주를 일정부분 규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 중에 도내 출신은 시인 서정주와 김해강, 소설가 채만식이 있다. 서정주·채만식의 친일 행적은 어느 정도 논란을 거쳐온 터라 새삼스러울게 없었으나 김해강의 경우는 달랐다. 김해강은 해방 이후 전북문단과 전북예총을 건설한 주역이며 ‘도민의 노래’를 비롯한 각급 학교 교가 등의 작시를 맡아 지역 사회와 끈끈하게 친화된 인물이다. 지역에서조차 거론되지 않던 그의 친일행적이 전체문인 42명에 포함될 정도였다는데 문화계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광복절을 맞아 최근 미당 시를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싣는 것이 옳은가 싣지 않는 것이 옳은가로 평단에 소요가 일고 있다. 민족이 있는 한 민족을 배반한 문학에 대한 시비는 멈추기 어렵다. △서정주·채만식·김해강 문학의 빛우리 문단에서 가장 골 깊은 애증의 대상인 미당 서정주(1915∼2000).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나 이미 한 해 전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시작 되는 시 ‘자화상’을 발표하여 천재의 등장을 알렸었다. 고향을 떠나 있었으나 그에게는 항상 ‘질마재’ ‘선운사’ ‘불교’의 이미지가 따라 다니며 그를 낳고 키운 고창의 자랑으로 부각됐다. 생전에 1천여 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왕성한 창작열과 괴기로움까지 풍기는 예술가적 풍모, 문단에서의 영향력으로 항상 우리 문단의 중심을 차지했었다. 그의 고향 선운초등학교는 미당문학관으로 개편됐다.백릉 채만식(1902∼1950)은 옥구 임피 출신이다.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길로’가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1934년 발표한 ‘레디 메이드 인생’이 출세작이다. 김해강과 채만식은 카프가 사실상 그들과 신념이 같다고 인정한 동반자 작가들이다. 가난과 조화롭지 못한 가정으로 평생 불우했으나 그의 문재(文才)만큼은 생전에도 충분히 빛을 발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전업작가가 되어 발표한 작품이 장편 ‘탁류’이다. 그 자신 생생하게 보고 경험한 군산 지역 민중들의 부초 같은 삶, 완급 없이 급발진으로 묘사한 남녀관계, 식민사회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관계가 잘 드러난 작품이었다.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긴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군산 금강하구둑에 세워졌다.김해강(1903∼1987)은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1925년 전주사범을 졸업하던 해 ‘조선문단’에 시 ‘달나라’가 당선돼 등단한 그는 다시 193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 날의 기원’이 당선됐다. 1936년 서정주를 최초로 소개한 ‘시건설’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청색마’와 ‘동방서곡’ ‘기도하는 마음으로’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초기에는 반일시에 가까운 강한 어조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0년대 이후 현실과 한 걸음 떨어진 채 자연과 교감하는 전통적 서정세계를 보였다. 그는 신석정·백양촌·박동화 등과 전북예총을 건설,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그리고 그림자‘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1944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미당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의 일부이다. 미당은 1942년부터 44년까지 모두 11편의 친일작품을 발표했다. 42년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이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그가 창씨개명한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문학’에 발표한 시 ‘무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시에는 ‘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유독 미당이 친일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끝끝내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크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군사정권을 미화하고 칭송한 행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채만식의 친일 작품은 1940년부터 발견된다. ‘인문평론’에 ‘나의 꽃과 병정’을 발표했고, 같은 해 매일신보에 ‘대륙 경륜의 장도 그 세계사적 의의’를 썼다. 41년에는 소설 ‘혈전’을 신시대에 발표했고 43년에는 자폭한 한 군인의 유가족을 방문하고 그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43년에는 매일신보에 ‘홍대하옵신 성은’을 발표하는 등 모두 13편의 친일작품을 남겼다. 징병제도가 시작됐음을 기뻐하는 ‘홍대하옵신 성은’은 ‘(나는) 이미 병정 갈 나이를 훨씬 지나친 몸이다. 일종의 노후물(老朽物)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커다란 감격과 영광을 직접 몸으로 느낄 길이 없다. 천추의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라는 2세가 있다. 그놈이 앞날에 나의 이 유감을 풀어줄 것이다. 그것으로 미흡하나마 위안을 삼는다’고 마치고 있다. 김해강의 친일 작품은 1942년에 발표한 3편이 발견됐다. 3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와 ‘호주(濠洲)여’를 발표했고 6월에는 ‘조광’에 시 ‘아름다운 태양’을 썼다. ‘국기를 손에 흔들며/어매에 등의 등에 매달린/착한 내 아들과 딸들/태양과 함께 커가는/내 아름다운 가족의 적은 손을 꼬옥 쥐여줍니다/태양과 함께 커가는/내 아름다운 가족의 어린 볼을 사뭇 부벼 줍니다’라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태양’은 친일의 표현이 모호하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다르다.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오호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대동아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소화의 군신이여!’하며 격렬하게 외친다.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1941년 특수잠수함을 타고 진주만 깊숙이 침공하여 미 해군 애리조나 호를 격침시키고 죽은 일본 대본영의 수군 9명을 기리는 작품이다. ‘특별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친일 행적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은 작품들이 증거한다. 감추거나 외면하는 것이 능사일 수 없다. 서정주·채만식·김해강, 돌아간 이는 말이 없다. 제대로 짚어 바로잡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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