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전북, 근대의 자취] 〈34〉김제부용 일제강점기 유적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4.06.22 14:29

정읍-초강-신태인-감곡-김제-와룡-부용-익산, 호남선 철도 연변 역마다 초여름 녹음 무성하다. 플랫폼은 한산하고 객차는 썰렁하다. 역이 간이역이나 무배치간이역으로 강등이 되건 말건 열차는 멎고 또 달린다. 초로에 접어든 승객이 학창시절의 통학열차를 추억하듯 열차도 역도 그 시절을 가장 영화롭게 기억한다. 남성고·이리고·공고·상고·여학생 칸까지 객차마다 학교 구별 엄연했던 70∼80년대 사회상과 더불어 각 역마다 타고 내리던 학생들의 수효가 활발하였으니, 싱그러운 소음 쉬임없이 토해내던 학생들 실어나를 때 열차는 가장 행복하지 않았을까. 호남선 익산과 와룡역 사이 부용역은 역원 2명이 근무하는 간이역이다. 1914년 호남선 개통과 함께 역이 설치됐다. 호남선 역 코앞에 도정공장이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전에서 목포까지 261.7㎞에 이르는 호남선은 일제가 호남의 풍부한 농산물을 군산항이나 목포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건설한 철도다. 신태인이 그러하듯 부용도 역이 설치되면서 도정공장과 금융조합, 주재소와 우체국에 이어 5일 장까지 열리던 번화한 근대 소읍이었다. 어느 시점부터 개발이 멈춘 부용역 앞은 일제강점기의 잔영과 어설픈 21세기가 부조화를 이루고 있다.△부용금융조합부용역이 위치한 행정구역은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부용역에서 보면 왼쪽으로 대형 농협창고가 서너 채 눈에 띈다. 창고 옆에는 담쟁이덩굴 뒤집어쓴 아담한 건물이 하나 있다. 1929년에 건립된 부용금융조합 건물이다. 뒤편의 사택 건물은 담쟁이덩굴에 완전히 뒤덮여 마치 사각으로 재단 된 숲이나 기묘한 봉분 같다. 건축양식은 서양식과 일본식의 절충식이다. 정면은 현관이 왼쪽으로 치우쳐 돌출됐고 현관의 윗부분 지붕을 피마미드형으로 맞댄 면에는 작은 창을 내어 목재로 장식했다. 건물 둘레의 밑동과 창호 윗부분은 인조석을 붙였으며 나머지 외벽은 시멘트 흩뿌리기로 마감했다. 지붕은 목조 트러스 위에 함석을 이어 붙였다. 길가 쪽으로 난 긴 수직창에는 철제 방범창이 둘러 있다. 사용하지 않은지 오래 되어 내부는 문이 열린 채 어지럽혀 있다. 통으로 된 사무실과 붙박이금고가 있다. 내부 벽면의 아랫부분은 목재를 붙였고 그 위와 천장은 회칠을 했다. 부용역 앞에는 일제강점기 부용금융조합에서 시작하여 농협에서 정년퇴임한 한순식씨(75)가 살고 있다. 부용리 출신으로 이 고장을 떠나본 적 없는 한씨는 일제 하 부용금융조합과 부용 읍내를 소상하게 기억해냈다. “1943년에 일당 50전을 받는 급사로 취직을 했지. 당시 월급이 일본 사람은 100원, 조선 사람은 20원을 줬어요. 같은 일을 허고도 조선인은 사람 취급을 못 받았어요. 부용금융조합이 공덕·용지·백구 3개면을 관장했어. 직원이 22명까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있었어요.”1907년 농업자금 대부를 목적으로 농촌에서 설립된 금융조합은 1918년 도시의 중·소 상공업자를 위한 대부로 업무를 확대하면서 도시금융조합을 발족시킨다. 당초 농사재료를 분배하거나 농민 조합원들이 생산한 작물을 위탁판매하는 겸영업무를 갖고 있던 금용조합은 도시조합이 생기면서 은행으로 성격이 변모, 부용금융조합이 설립되던 1929년에는 겸영업무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용지·백구 일대에서 거두어들인 쌀의 반출구인 부용이 상업적 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부용금융조합을 중심으로 일인지주와 상인들의 금융거래가 활발했다. 김제 지역의 금융조합은 부용 외에도 금구·원평·김제·만경·죽산 등지에 설치됐다.한순식씨는 해방될 때까지 전주에 있는 전북금융조합연합회로 출장 심부름을 다녔다. 대중교통 변변치 않은 시절이라 부용에서 전주까지 반나절 꼬박 걸어서 연합회에서 일을 보고 밤 12시가 다 되어 돌아오는 머나먼 길이었다. 부용금융조합은 해방 후 농업은행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농협으로 변신한다. 단위농협으로 체제를 바꾸면서 부용금융조합은 백구농협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백구농협이 소재지 농협과 합병되면서 건물은 영진합성수지가 인수했으나 지금은 이들마저 떠나 황폐해졌다. △오오쓰미(大隅) 도정공장흔히 부용도정공장, 월봉도정공장이라고 부르는 이 도정공장은 일제 강점기 큐우슈우(九州) 시코쿠(四國) 출신 지주 오오쓰미(大隅)가 세웠다. 도정공장의 총 규모는 대지 4,136㎡, 건축연면적 2,376㎡로 몸체는 목조, 지붕은 함석이다. 현재의 규모는 1946년 공장 증축과 1979년 철근 콘크리트조 창고 증축으로 확장된 것이다. 김제 일대의 벼는 다 여기서 찧어 나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정공장의 위세는 대단했다. 70대 이상 마을 노인들은 “도정공장 마당에 노적가리가 산처럼 쌓이고 마당 가운데로는 말리느라 늘어놓은 벼로 사람 걸어다닐 자리가 없었다”고 기억했다. 현재 주인인 이창열씨(76)가 도정공장을 인수한 것은 1963년. 해방 후 신한공사에서 관리하던 것을 서울 출신 이일신씨가 매입했고 그에게서 이창열씨가 다시 매입하였다. 백구면 석담리 출신인 이창열씨는 91년 도의원에 당선되어 93∼95년 도의장을 지냈다. 도정업으로 가세를 일으킨 이창열씨는 이 일과 관련하여 누구 못지 않은 격세지감이 있다. “정부양곡도정공장 역할을 하면서 인근 백산면 도정미까지 관할하며 연간 7만 가마니를 도정했어요. 도정공장 직원이 20명이 넘었지요. 정미기가 6대에 보리정맥기가 20대에 달해요. 그런데 정부가 90년대 농협 RPC사업을 시작하면서 민간 도정업이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이제는 청소조차 힘들어요.”지금도 도정공장은 가동되고 있다. 소매를 주로 하는 대형 슈퍼에 납품하는 40㎏짜리 쌀을 1년에 3,000개 정도 작업하는데 그치고 있다. 상호도 ‘부용도정공장’을 거쳐 ‘김제산업사’로 바뀌었다. 한물간 읍내와 한낮에도 인적이 드문 거리의 부용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60∼70년 전만해도 가장 번화했던 부용이 이것이 뭐다냐”고 묻는다. 5일마다 열리던 부용장은 특히 우시장과 가마니장이 유명했다. 돈이 잘 돌고 기관이 많았기 때문에 상점과 유흥업도 번화했다. 열차가 교통수단으로 별 기능을 못하는데다 큰 도로에 면하지 않은 부용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며 내륙의 오지가 되었다. /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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