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문화연구소, ’임진왜란 웅치전투와 그 전적지’
전라문화연구소, ’임진왜란 웅치전투와 그 전적지’
  • 새전북신문
  • 승인 2006.06.2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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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가장 큰 전란이자 민족사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초기에 호남방어의 결정적 계기가 됐던 웅치전투. 호남으로 공격해오는 왜적을 막아 호남방어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전투로서 임란 당시 5년간 최대 곡창지대였던 호남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고 지켜져 결국 전쟁에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웅치전투는 전라도를 지킨 전투를 넘어서 조선 전체를 지킨 전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역사적 의의가 커 지난 1976년 웅치전적지가 전북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된 바 있다. 하지만 웅치전투는 역사학자나 일부 주민들만이 그 중요성이나 가치를 인식할 뿐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게 사실. 이런 가운데 최근 진안군의 지원을 받아 웅치전적지를 역사적 위상에 걸맞게 정확한 위치비정과 보존관리·활용방안 마련을 통해 사적지로 정비하기 위한 연구작업을 진행한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소장 하태규·전북대 교수)가 지난 3월 열린 학술 심포지엄 자료를 정리·보완해 책으로 펴냈다. ‘임진왜란 웅치전투와 그 전적지(도서출판 선명)’가 바로 그것. 이번 책은 임진왜란 전문가, 향토사학자, 고고학 전문가 등 5명이 공동 집필했다.조원래 순천대 사학과 교수는 “웅치전투를 위시해 진안 금산 일원에서 전개된 임란 초기의 격전이 임진왜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크다. 당시 전투결과는 조선의 부원(富源)이었던 호남을 지켜낸 것이고 이것이 곧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이겨낸 동력으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용엽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은 ‘웅치전적지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과 전승자료’를 통해 “그동안 웅치전적지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은 객관적인 사료에 근거하기보다는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승자료에 많이 의존했었다”며 “하지만 이번 학술조사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금석문 2기를 발견했고 일제 강점기 당시 면사무소에서 제작된 지적도를 찾아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그동안 학계에서 웅치전투의 주 전적지의 위치선정을 두고 논란이 되었는데 이번에 170여년 전에 세워진 최학부의 비석을 발견해 구 곰치재 주변이 주 전적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하지만 이번 조사는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련기관에서 시굴조사를 통해 보다 명확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고 주장했다.박재광 전쟁기념관 학예연구관은 “웅치전적지 보존 및 활용방안의 기본방향은 전적지의 원형복원과 역사성이 부각될 수 있는 교육 문화공간 구상, 현지 여건에 걸맞는 친환경적인 시설물 도입, 주변 역사자원과 연계된 관광개발 계획의 수립이다”며 “이를 바탕으로 한 웅치전적지 활용방안은 전적지 발굴·조사연구, 천인의총 보존과 사당건립, 웅치전투 박물관 건립의 과정을 거치는 특화된 관광지로의 개발이나 웅치전투를 테마로 한 역사·문화 테마파크 등을 꼽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하태규 전북대 전라문화연구소 소장은 “현재 웅치전적지는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일원에 한정돼 있지만 지난 88년 우리 연구소가 실시한 진안군 지표조사 결과 진안군 부귀면 세동리 덕봉마을이 웅치전투의 주요 전적지였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웅치전적지의 위치를 정확하게 고증하고 정비해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필요가 절실한 상황이다”며 “따라서 이번 연구를 통해 웅치전투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지역민의 인식과 자긍심 함양, 순결영령에 대한 추모를 위해 웅치전적지를 호국사적으로 정비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고 말했다./한재일기자 hji75@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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