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봉의 개봉영화 보기] <8> 바벨
[하재봉의 개봉영화 보기] <8> 바벨
  • 이형렬 기자
  • 승인 2007.02.22 15: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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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주연:브래드 피트, 케이트 블란쳇

장르:드라마, 스릴러

서로 소통되지 않는 혼돈의 언어 속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 싶은 욕망이 바벨탑을 만들었다.

‘아모레스 페로스’와 ‘21그램’을 만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감독의 3번째 작품 ‘바벨’에는 혼돈의 시대를 통찰하는 번뜩이는 혜안이 담겨 있다.

911을 단순히 문명의 충돌의 연장선상에서만 파악하면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는가.

알레한드로 감독은 우리를 갈라 놓는 것은 서로 다른 피부색이나, 소통되지 않는 언어, 혹은 지역적 경계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경계라고 말한다.

LA에 살고 있는 리처드(브래드 피트 분)가 멕시코 출신 보모에게 어린 두 아이를 맡기고 아내 수잔(케이트 블란쳇 분)과 함께 모로코 사막으로 여행을 간다.

아이의 죽음은 사고였지만 수잔의 상심은 깊어서 리처드는 모로코 여행을 계획했다. 여행 중에도 그들의 머리 속에서는 죽은 아이 생각 뿐이다.

관광객을 태우고 사막을 지나가던 버스에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창가에 앉아 있던 수잔이 피를 흘린다.

‘바벨’은 친절하지 않다. 모로코 사막의 황량한 풍경 뒤에 곧바로 거대도시 일본 동경시내를 부유하는 청각장애자 여고생 치에코(키쿠지 린코 분)와 그녀의 아버지 아스지로(야쿠쇼 코지 분)가 나타난다. 너무나 다른 두 공간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관객들은 의아하게 지켜봐야 한다. 마음을 닫아버린 딸 치에코와 힘겹게 소통을 시도하는 아버지.

치에코는 밤거리를 방황한다. 화장실에서 팬티를 벗고 카페 의자에 앉아 짧은 치마 사이의 두 다리를 벌려 남학생들을 당황하게 한다.

리차드 부부의 아이를 맡고 있는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라자 분)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십여년 만에 멕시코로 가지만 다시 미국 국경을 넘어 오는 것은 쉽지 않다. 국경 검문소에서는 음주운전의 조카와 아멜리아의 신분을 의심한다. 미국과 멕시코의 황량한 국경지대에 버려진 아이들과 아멜리아는 생사의 기로에 선다.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지대를 불안하게 서성거리는 리처드 부부의 두 아이와 유모, 어머니의 자살로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동경의 청각장애 여고생과 그녀의 아버지, 그리고 피 흘리는 부인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절규하는 모로코 사막의 남편. 지구의 극과 극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적처럼 희미하게 연결된다.

깨진 거울조각처럼 파편화 된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어떤 논리적 설득력 때문이 아니다.

‘바벨’의 서사에 이성적 논리가 개입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나리투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감각적 구성과 편집이 서사를 압도한다.

기승전결식의 상투적 서사를 집어던지고 복잡하게 뒤엉킨 삶의 실체적 진실을 서서히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감독의 취향은 ‘바벨’에서도 지속된다.

고통스러운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선택한 모로코 여행, 불모의 사막 지대와 마른 먼지가 풀풀 흩날리는 회색의 풍광은 그 곳에 버려진 리처드 부부를 더욱 외롭고 황폐하게 만든다.

도쿄의 여고생 치에코는 ‘바벨’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 가장 인상적이다.

모로코 사막에서 사용된 총이 치에코의 아버지 소유라는 것을 조사하기 위해 찾아온 형사 앞에서 그녀는 옷을 벗는다.

미국인 관광객들은 리처드 부부를 사막에 버리고 가버렸지만, 사막의 중동인은 피 흘리는 수잔을 위해 머물 곳을 제공하고 응급조치로 수술할 수 있는 의사를 데리고 온다.

마을을 떠나기 직전, 리처드는 지갑을 열고 돈뭉치를 건네지만 그는 완강하게 거절한다.

무섭게만 보였던 중동인들이 오히려 죽어가는 미국인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것을 보고 리처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서로 다른 세 공간의 이야기가 교차 편집된 구성으로 주연들의 비중이 높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조연들의 연기가 부각되는 ‘바벨’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두 명의 후보를 동시에 올려 놓고 있다. 청각장애 여고생 역의 키쿠지 린코는 반항적이면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내면을, 리처드 부부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멕시코 유모 아멜리아 역의 아디리아나 바라자는 국경 검문소에서 천대 받는 불법 이민자의 비애를 사실적으로 호소력 있게 그려낸다.

모로코 사막과 멕시코의 국경지대 그리고 일본 동경의 한 복판이 교차 편집되면서,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던 이질적 요소들이 연결되며 바벨탑이 세워진다.

그 순간, 우리 내면에 존재했던 어떤 벽들이 무너지고 따뜻한 강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러닝타임 142분, 18세 이상 관람가, 22일 개봉.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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