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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산책]<21>망종
2008년 02월 28일 (목) 새전북신문 sjb8282@sjbnews.com
   
보리밭을 향해 발길을 재촉해야 하는 시기 - 영화 망종(2005)

장률감독, 109분, 한국 · 중국



<망종>은 황량하고 인적이 드믄 중국 변방에 살고 있는 조선족 여성, 최순희를 둘러싼 비극을 그리고 있다. 서른 두살의 젊은 순희는 살인을 저지른 남편 때문에 고향을 떠나서 어린 아들 창호와 김치를 팔며 살아간다. 그녀에게 삶은 녹녹치 않고, 자신의 감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다. 거대한 중국 대륙에서 드러나지 않는 조선족 여성을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은 그녀들만이 거리에서 김치를 판다는 것이다. “중국 어딜 가도 김치를 파는 조선족 여성들을 볼 수 있어요. 늘 부지런하게 살지만 또 언제나 사회의 가장 하층민이죠.” 라고 말하는 장률감독은 중국과 한국의 경계인으로 살아야했던 자신의 그림자를 영화에 투영하고 있다. '국적'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며, '민족주의자'이기를 거부하는 자유주의자 장률 감독은 거부할 수 없는 자아 정체성의 가장 원초적인 '입맛'이었던 '김치'를 모티브로, 국적을 넘어서서 육체에 코드화된 전통과 문화를 드러낸다.



장률은 감독이 되기 전에 중국 길림성 연변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한 뒤 연변대학교 중문학과 교수 생활을 했다. 영화 교육이 전무한 상태에서 만든 <11세>가 베니스 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선정되면서, 그는 세계 영화인들이 주목하는 아시아 감독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장편 데뷔작 <당시>를 거쳐, <망종>, <히야쯔가르(경계)>에 이르기까지 조용하고 차분한 시선으로 전 세계 시네필의 마음을 움직였다.

<망종>은 중국 북경 근교의 시골마을에서 촬영한 영화다. 프리 프로덕션과 포스트 프로덕션 과정은 한국에서 이루어졌으나 실제 촬영 과정은 철저하게 중국 스텝과 캐스트들로만 이루어졌다. 물론 <비천무>, <무사>등과 같이 이미 중국에서 제작된 전작들이 있지만, <망종>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재중 동포 장률 감독이 중국 현지 스텝과 배우 캐스팅을 통해 중국 저예산 제작 시스템을 최대한 활용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소외된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

재중동포 3세로 태어난 장률 감독은 중국 소수 민족인 '조선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끊임없이 고민해 왔다. 현재 제작 중인 <이리> 이전의 작품이 모두 ‘조선족’의 생활을 그리고 있다. <당시>는 하루도 집 밖에서 나가지 않는 전직 소매치기, <망종>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조선족 여인, <히야쯔가르(경계)>는 몽고와 중국 경계에 사는 조선족 모자 이야기, <두만강>은 탈북 소년과 조선족 소년의 우정을 담고 있다. 이 작품들은 모두 소외된 이방인인 조선족의 삶을 통해 그들의 애환을 솔직하고 담백하게 담아내고 있다.

순희와 함께 사는 매춘부 두 명이 벽보에 적힌 글을 읽는다. "망종 때가 다가오니 동네방네 모든 이들이 곡식을 거둬들이는구나. 건강에 신경 쓰고 사전예방에 힘쓰라. 망종, 망종. 한해 중 가장 바쁜 때이거늘 올해도 찾아왔구나! 어서 고향에 가야지". 조선족 뿐 아니라, 정신을 붙박아둘 곳이 없는 그들 모두 실향민이다. 아들 창호도 엄마에게 언제 고향에 돌아갈 것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답을 듣기도 전에 고향에 돌아간 다음에 언제 다시 이곳으로 올 것인지를 묻는다. 결국 그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은 지리적인 공간이 아님을 의미한다. 유목민의 심정으로 정박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 돌아가지 못할 '고향'에 대한 향수를 껴안고 산다.



절제된 영상 문법 - 적막한 삶에 대한 이야기

장률 감독은 절제된 카메라 기법과 꾸밈없는 사실적인 묘사를 극대화하여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새로운 영상 문법을 만들어냈다. 고정된 카메라는 롱샷과 원씬, 원컷을 결합함으로써 객관성을 유지하고, 인물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며, 간혹 간결한 대화를 사용할 뿐이다. 아들 창호를 위해 사온 TV, 아들의 죽음 이후에 김치를 담그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선풍기만이 소란스러울 뿐이다. 소수자의 삶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언어가 있다면, 그것은 '침묵'일 것이다. 장률감독은 "현란한 카메라와 말초적인 영화적 조미료를 첨가한 기법으로는 전달 할 수 없는 깔끔함 속에 정교함으로 새로운 운율을 만들어 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감독은 멀찌감치 순희를 지켜볼 뿐, 클로즈업을 통한 과잉 감정을 끌어내지 않는다. 순희가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포커스 아웃시키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 뒤에 존재하는 풍경만을 바라보도록 한다. <망종>은 "침묵의 무게, 차마 말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해 돌멩이처럼 단단하게 굳어져가는 슬픔의 무게를, 한결같은 호흡"으로 전해준다.



장률감독은 억압받고 소외된 '여성'을 다루고 있지만, 김기덕 감독과는 전혀 다른 감수성과 방식으로 '그녀'의 삶을 기록한다. 그것은 장률감독이 권력의 미시적 작동 방식에 민감하며, 권력이 매개된 영화안팎의 코드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 창작으로 이루어지는 영화가 감독의 것이 되는 것을 태생적으로 받아
   
들이지 못하는 그이기 때문에 남성 권력 앞에 성적 수단으로 전락하는 순희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섬세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조선족 뿐 아니라 언젠가 한국을 배경으로 한국인이 등장하는 영화를 꼭 찍고 싶다고 했던 장률 감독은 이제 곧 <이리>(2008)를 가지고 관객을 찾아온다. <이리>는 1977년 이리 역(현 익산 역) 폭발사고를 배경으로 30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상처와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담아낸다. 우리 고장을 배경으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촬영하는 첫 영화이기에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될 것이다.



/김혜영 객원전문기자(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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