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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산책]<26>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2008년 04월 03일 (목) 이주봉 객원전문기자 sjb8282@sjbnews.com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70년대 초반 뮌헨에서 더글라스 서크 회고전을 보고선 큰 감명을 받는다. 파스빈더의 대표적인 작품인 1974년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는 이 할리우드의 위대한 멜로드라마 감독이 1955년에 만든 멜로드라마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All That Heaven Allows> (주연: 록 허드슨, 제인 와이먼)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영화로 알려져 있다.

서크는 <하늘이 허락한 모든 것>에서 미망인이자 두 자녀의 엄마인 중년의 캐리(Jane Wyman)가 젊은 정원사 론(Rock Hudson)과 사랑에 빠져 상류사회인 자신의 이웃과 가족에게 소외당하는 모습을 다룬 바 있다. 파스빈더는 서크의 영화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아웃사이더로 청소부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하게 늙어가는 여인과 당시 독일(서독)의 경제 성장이라는 현실 속에서 모로코 젊은 이주노동자의 만남과 사랑으로 그 설정을 바꾸었을 따름이다.

60대로 보이는 청소부 에미(Brigitte Mira)는 자신보다 적어도 20세는 어려보이는 아랍인 이주노동자 알리(El Hedi ben Salem)에게서 외로움에서 오는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알리도 이런 에미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웃과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에미와 알리가 이런 시선을 꿋꿋이 견디는 와중에 이웃들은 자신들의 속물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금세 에미에게 도움을 청하며 그녀의 상황을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에미는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웃들과 다름없이 알리를 하나의 대상으로 대하게 된다. 알리는 에미를 떠나게 되고, 에미와 알리는 처음 만난 술집에서 자신들의 과오를 서로 뉘우친다.

파스빈더는 멜로드라마적 구성 속에서 만들어낸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당대 사회 문화적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역사의식까지 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데 성공하고 있다. 서크가 보여준 할리우드의 멜로드라마의 외형을 차용했지만 파스빈더 특유의 독일 사회 비판이 작품에 빛을 더하는데, 바로 독일 시민 사회의 속물적 모습이라든지 일상에서 누구에게서나 쉬 드러날 수 있는 파시즘적 행태에 대한 묘사 등에서는 뉴 저먼 시네마 대표 감독의 대가적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영화에 스며있는 현실 비판적 태도는 특히나 파스빈더 영화가 보여주는 양식화되고 어느 정도는 과장된 연기로 강조되는데, 여기에서는 브레히트적 영향을 떠올리게 한다.

빠른 전개나 이야기 중심의 속도감 있는 전개를 보이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파스빈더의 이 영화에서는 미장센을 강조한 상징성 있는 영상들이 영화 내용의 진폭을 끊임없이 확장해준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에서는 특히 공간에 대한 파스빈더 특유의 뉘앙스를 통해 주인공 에미와 알리가 사회의 아웃사이더로서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커다란 울림으로 전달해주기도 한다. 이 영화의 미장센은 파스빈더의 많은 영화를 촬영했던 마하엘 발하우스의 현란한 영상과는 달리 사진의 전통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사진에서 출발한 카메라맨 위르겐 위르게스의 손길이 느껴진다. 또 에미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는 브리기테 미라는 파스빈더에 의해 재발굴되어 제2의 연기 인생을 펼친다.

이 영화는 파스빈더의 대표작 중 하나로 그 해 칸에서 비평가 상을 수상했으며, 파스빈더의 마술과 같은 영상들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파스빈더 멜로드라마의 깊이와 인간 내면에 깃든 감정의 애틋함을 만나고 싶은 관객에게 강추하고 싶은 영화이다.

/이주봉 객원전문기자(군산대 전임강사-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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