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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산책]<74>오이디푸스 왕
2009년 06월 11일 (목) 새전북신문 sjb8282@sjbnews.com
시인이며 소설가이고 혁명가이자 영화감독인 ‘현대영화의 기린아’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폭력에 대한 과격한 묘사와 권력의 메카니즘을 카메라에 담고자했던, 흔히 ‘우화’를 통한 정치적 강령을 내세우는 감독으로 묘사된다. 파솔리니의 <오이디푸스 왕>는 그리스 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진 기존의 오이디푸스 내러티브를 모로코 배경으로 한 파솔리니 자신의 정체성 탐구의 과정이자, 그의 인생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파솔리니는 첫 시집인 <카사르사의 노래(1942)>를 시작으로 <마마로마 (1962)>, <백색 치즈(1963)>, <마태복음 Il(1965)>, <매와 참새 (1966)>, <오이디푸스 왕(1967)>, <메데아 (1970)>, <살로 소돔의 120일 (1975)>등의 작품들을 남겼다. 영화 <오이디푸스 왕>에서 파졸리니가 보여주고자 하는 오이디푸스는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신의 희생양으로서 비극적 삶을 마감하는, 실존적 의미의 정체성 탐구자로서의 오이디푸스가 아닌, 부친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면서 ‘부친살해’의 욕망을 품어가는 오이디푸스라는 점이 특이하다.

훗날, 후 샤오시엔과 첸 카이거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파솔리니는 원작과 달리 맹인이 된 오이디푸스를 미소년과 동행하며 현대 이탈리아를 떠돌게 함으로써,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아버지의 억압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투쟁과 ‘부친살해’의 원형적 욕망에 천착한다. 파솔리니 영화의 현실감은 스튜디오 촬영에 의해서가 아닌 현실 속에 들이 댄 카메라의 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그의 영화는 상당 부분 신화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데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돋우기 위하여 비주얼한 색채 사용에 항상 신중을 기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은 대략 10 가지 에피소드들로 사건이 전개되는 플롯의 전형적인 희랍 비극이다. 테베 시의 재앙에 대한 처방으로 크레온은 라이오스 왕의 살인범을 잡아야한다는 신탁을 전한다. 테베 시의 곤경과 구원 의식을 코러스가 전하고 나면, 오이디푸스가 등장하여 라이오스 살인범을 찾아내라고 명령을 내린다. 다시 등장한 코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다시 한 번 현명하게 테베 시를 구원해보라는 시민들의 소망을 전한다. 살인범을 묻는 오이디푸스에게 예언자 테레시아스는 그 범인은 곧 오이디푸스 왕 당신 자신이라는 말에 오만한 오이디푸스는 그것은 처남인 크레온의 음모라고 일축해버린다. 코러스는 왕비 이오카스타가 신탁 자체와, 그 신탁을 내린 신의 존재에 의혹을 품는다는 메시지를 노래로 전달한다. 코린토스의 사자가 등장하여 폴리부스의 사망 소식을 전달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신탁이 오류였음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하지만 라이오스 왕의 참변 현장에서의 유일한 생존자인 목자는 자기가 직접 변방에 버려진 어린 오이디푸스를 폴리부스에게 데려다 주었노라고 증언한다. 이에 이오카스터는 자신이 버리라고 했던 그 어린 오이디푸스에 대한 기억으로 상황이 급반전됨을 느끼고 궁궐 안으로 들어 가버린다. 목자가 마침내 모든 사실을 실토하자 오이디푸스의 출생과 친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가 소상하게 드러난다. 이에, 오이디푸스는 자책하며 자신의 약속대로 송곳으로 두 눈을 찌르고 황야를 방황하게 되고, 이오카스터는 자살한다.

그러나 이러한 소포클레스의 원작과는 달리, 파솔리니의 <오이디푸스왕>은 오이디푸스가 태어나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가는 연대기적 수순을 따라가지만, 영화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고대 희랍이 아니라 1930년대 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솔리니의 영화 <오이디푸스왕>의 시간대는 파괴되고 배경은 야만과 문명을 오가며 형이상학적인 성질을 부여한다. 감각적인 칼라의 구름과 나무의 흔들림을 향하던 카메라의 눈이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에게 포커스를 맞추면서 이 영화는 시작한다. 오이디푸스의 어머니는 노골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낯설게 응시한다. 에필로그에서, 갓난 오이디푸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터의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은 요란한 군악 소리와 함께 귀환한 라이우스에 의해 깨져버린다. 어머니를 빼앗긴 오이디푸스가 울음을 터뜨리자 라이우스는 아기의 발을 거칠게 움켜쥔다. 그 다음 장면에서야 영화는 고대 그리스로 넘어간다.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인 감정, 그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희랍 비극 <오이디푸스왕>과 직결되는 특별한 경험이다. 이로써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오이디푸스처럼, 파솔리니는 필연적으로 <오이디푸스왕>을 연출하고, 에필로그에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성 밖으로 나간다. 다음의 에필로그에서 시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니네토 다볼리에게 의지하며 떠돌아다닌다. 그는 볼로냐의 대성당 앞 광장과 밀라노의 공장지대에서 피리를 불지만,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눈을 잃은 오이디푸스는 심오한 깨달음을 안고 현대의 문명시대로 복귀하여, 프롤로그의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파솔리니의 영화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오이디푸스왕>은 시적이면서 직설적으로 표현되며, 원초적이고 잔혹하리만큼 사실적이어서 일견 초현실주의적인 감수성과도 맞닿아있다. 영화 <오이디푸스왕>을 보면, 고대의 테베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리스 시대의 풍경도 아니고, 세련된 서구의 문명과도 관계없는 어딘지 원초적인 비주얼로 나타난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던 파솔리니는 오이디푸스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은유한다. 화해 없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자신이 아버지가 될 나이가 되었지만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때야 비로소 자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파솔리니였기 때문이다.

파솔리니 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삶의 통합적 진실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오만한 오이디푸스의 후예다. 결국 스스로의 눈을 찌르는 통한의 아픔을 겪고 나서야 자신의 운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운명의 아이러니 아닌가! 메타적 감수성의 오늘날, “삶이란 시작된 곳에서 끝난다.”는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울림은 의미심장하게 다각도에서 메아리치며 다가온다. 파솔리니의 오이디푸스는 물론, 저 태고적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던지는 자조와 성찰의 이 메시지는 오만과 미망 속에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여전히 유의미하다.

/김성희 객원전문기자(백제예술대학 방송시나리오극작과 교수, 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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