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 대탐사]모래재~만덕산~북치
[호남정맥 대탐사]모래재~만덕산~북치
  • 이용규 기자
  • 승인 2009.10.08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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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군 만덕산에서 임실 쪽으로 바라본 호남정맥 줄기가 힘차게 뻗어 있다.

하늘은 점점 높아지고 들녘은 온통 황금 빛깔이다. 연록빛으로 물들어가는 숲과 함께 시작된 호남정맥 대탐사가 5개월째 접어들면서 어느새 결실의 계절을 만나게 됐다.

이번 탐사 구간은 임진왜란 당시 군사적 요충지였던 모래재 능선을 따라 곰티재(웅치 熊峙)~만덕산~북치에 이르는 14㎞ 구간이다.

오전 8시 10분. 출발지인 전주가 가까워지면서 탐사일정이 일찍 시작됐다. 모래재의 작은 휴게소에서 출발한 대원들은 산자락을 깎아 만든 공원묘지를 통과했다. 공원묘지 사이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 때까지 잘려져 휑한 산자락을 보며 걸었다. 달갑지 않았다.

본격적인 산행을 위해 오솔길로 접어 들었다. 산길엔 쑥부쟁이가 지천이다. 간간이 물봉선이 대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건드리면 툭 터지는 물봉선은 시냇가 등 습기많은 곳에 자생하는 식물이다. ‘날 건드리지 말라’는 꽃 말이 재밌다. 물봉선은 누군가 살짝 건드려줘야 발아 되고 건드려주지 않으면 스스로 터져 발아되는 야생화다.

8시 30분이 지나자 모래재 정상 주줄산에 다다랐다. 금남정맥과 진짜 호남정맥의 분기점이다. 지금껏 걸어 온 호남정맥 67㎞는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이 겹치는 구간이다. 이날부터 걷는 모래재 정상의 주줄산(주화산)이 두 정맥의 분기점인 것이다. 금강의 남쪽에 있는 금남정맥은 모래재~운장산~대둔산~계룡산으로 이어진다.

호남정맥은 장수~마이산~만덕산~경각산~내장산~강천산 등 호남지역 전체를 모두 아우른다.

▲ 호남정맥 대원들이 곰티재를 향하고 있다.
주줄산 갈림길에서 곰티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산길엔 벌써 도토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부지런한 다람쥐도 눈에 띄었다.

군데 군데 군인들이 사용했을 법한 시멘트 블럭으로 된 참호가 보였다. 임진왜란 왜군의 전주진격을 저지했던 곰티재를 중심으로 한 호남정맥 줄기가 지금까지도 요새 역할을 했다는 흔적들이다.

한 참을 걸어 9시 20분께 능선이 푹 꺼져 있는 고갯길을 만났다. 적래재다. 적래재는 새가 총총 걸음을 한다는 조약치와 곰티재의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완주 소양면과 진안 부귀면 적천마을을 접하고 있다. 적래재는 도로가 개설되기 전 진안의 물산이 전주를 오고간 곳으로 일설에는 전주를 오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도 한다.

적래재를 벗어나자 사람 키를 넘는 산죽 터널이 펼쳐졌다. 바스락거리는 산죽터널을 뚫고 지나가자 산길에 대한광업진흥공사의 콘크리트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신보광산 표지석이다. 산자락에 위치한 신보광산은 한 때 한국 유일의 활석광산이었다. 1980년대 초까지 생산이 이뤄졌던 신보광산의 활석은 점차 중국산에 밀려 쇠퇴했다. 요즘은 폐쇄되고 방치된 활석에 탈크가 함유돼 있고 광산 주변은 우라늄으로 오염됐다는 환경단체의 지적으로 논란이 일고 있다.

▲ 가을 도토리가 탐스럽게 여물어 오솔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땀방울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힐 무렵 대원 한 명이 농담반 진담반 섞어 오소리라는 놈의 이름 유래를 풀어 놓았다. 일반적으로 오소리는 오솔길 옆에 굴을 파 생활하면서 바로 옆에 배설을 하는데 이는 영역 표시와 더불어 배설물을 먹기 위해 나타난 곤충들을 잡아먹기 위해서란다. 이처럼 오솔길을 맴돈다고 해서 오소리라 불린다고 그는 말했다.

산죽길을 벗어나니 우거진 숲 사이로 펼쳐진 파란 하늘에 눈이 시렸다. 11시 20분께 곰티재에 도착했다. 곰티재는 임진왜란때 왜군을 저지한 곳으로 유명하다. 끝내 왜군은 관군을 뚫고 전주로 향했지만 전주 입구 안덕원에서 대패했다. 바로 이곳 곰티재에서 전력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곰티재는 왜군이 처음 대패한 곳이고 호남지역 의병·관군의 거점이 됐던 곳이다.

곰티재에는 이러한 역사적 전과를 기리는 웅치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1979년에 세워진 듯한 전적비와 주변은 곰티재의 명성과 달리 초라했다. 때마침 추석을 맞아 성묘를 하려 한무리의 가족들이 올라왔다. 전적비 바로 옆에 수목장을 해놓은 후손들이다.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을 지냈다는 김한진씨는 “당시 곰티재는 후생사업의 일환으로 민간에게 보급된 미제 GMC트럭들이 벌목된 소나무를 전주로 수 없이 실어 나르는 길목이었다”며 “당시 이른바 공비소탕이 많았고 국군의 소행이었는지 아니면 빨치산의 소행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수십여구의 시신이 발견된 곳이 바로 이곳 이었다”고 회고했다.

▲ 잔대. 쌍떡잎식물 초롱꽃목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한방에서는 뿌리를 사삼이라고 하며 진해, 거담, 거담, 해열, 강장, 배농제로 사용한다.

전적비 아래서 먹은 이른 점심 덕분으로 오후 일정도 빨라졌다. 12시 30분을 넘기면서 곰티재를 뒤로 했다. 만덕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곳곳에서 암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원불교의 성지인 만덕산의 남쪽에는 원불교 수련원이 위치해있고 북쪽의 완주군 소양 신촌 방향에는 익산에서 장수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만덕산 자락을 꿰뚫고 지나간다.

산 한 가운데를 100m 이상의 교각을 이용해 터널을 뚫고 도로를 놓은 탓에 차량이 지날 때마다 산자락에 부딪힌 자동차 엔진이 귀를 찌른다. 산비탈을 관통하는 익산∼장수 고속도로는 장수사람들의 생활풍속을 크게 바꿔놓고 있다.

과거에는 1시간 이상 걸리던 전주길이 40분 거리로 단축됐고 공무원들은 장수에 머무르지 않고 전주에서 출퇴근 한다. 장수사람들도 이제 웬만한 규모의 일은 전주로 보러가게 됐다. 고속도로는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지만 농촌과 도시간의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만덕산 정상에 오르자 전주와 모악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더 쾌청했다면 멀리 서해바다까지 보일 듯했다. 만덕산에서 바라보니 호남정맥의 서쪽으로 전주를 비롯해 누런 평야지대가 드넓게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산악지형이 장엄하기 그지없다.

▲ 호남정맥 만덕산을 가로지르는 익산~장수 고속도로 교각. 가장 높은 교각이 100m가 넘어 전국서 최고로 높다.


만덕산을 뒤로하고 마재를 지나 558봉에서 남쪽을 내려다보니 마이산회봉온천 공사현장과 진안리조트 계획부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온천을 만든다고 15년째 터만 닦고 있다. 온천관광지는 접고 골재장사만 하고 있는 분위기다. 사업타당성도 없는 공사에 호남정맥이 멍들고 있다. 이렇게 잘리고 할킨 산등성이를 뒤로한채 이날 탐사 일정이 마무리 됐다. 다음은 일정은 북치에서 쑥고개까지다.

/곰티재(진안)=이용규 기자 lyg@sjbnews.com


▲ 곰티재에 세워져 있는 웅치전적비.
[호남정맥 이야기]호남정맥과 임진왜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주줄산(다른 이름 주화산·568m)에서 호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6㎞ 정도를 내려가면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신작로길, 곰티재가 나오고 곰티재에는 웅치전적비가 우뚝 서있다. 곰티재는 서쪽으로 완주군 소양을 거쳐 전주로 이어지는 길이고 동쪽으로는 진안을 거쳐 금산 또는 육십령을 거쳐 경상도로 향하는 길목이다.

웅치전적비는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에 맞서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기리고 웅치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웅치전투는 임진왜란 초 호남을 방어하고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는 매우 중요한 전투였으며, 호남정맥의 역사성을 일깨워주는 의미 있는 전투라 할 수 있다.

1592년 4월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고 개전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하였다. 임진란 2개월 만인 6월 15일 왜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6월말 경 전라도를 제외한 조선 8도가 왜군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조선8도를 분할 점령·통치할 것을 결정하였고, 소조천융경은 1만5,000여명의 왜군을 거느리고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5월 25일 임진강을 떠나 전라도로 남하하였다.

6월말 소조천융경은 호남의 금산지역을 점령하고 용담, 진안을 거쳐 전라감영인 전주로 향하기 위해 진안으로 진군한다. 마침내 1592년 7월 8일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왜군은 진안현에서 웅치로 진격하였으나,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의 활약에 큰 타격을 입는다. 치열한 전투 끝에 비록 웅치전투에서 호남의 관군과 의병이 패하기는 하였지만 왜군의 전력에 큰 손실을 입혀 왜군은 전주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덕원에서 조선군에 패하여 후퇴하기에 이른다.

또한 웅치전투에서 패퇴한 왜군은 7월 말경 전력을 보강해 금산에서 진산을 거쳐 전주로 재차 진격을 시도한다. 금남정맥상에 위치한 대둔산의 이치(배티재)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의 활약으로 왜군은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물러갔으니 이후 임진왜란 5년 동안 왜군은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했으며, 호남지역은 조선을 되찾는 토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금산, 진안, 무주 등을 제외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안쪽의 전라도가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

웅치와 이치전투 못지않게 임진왜란 때 호남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1,2차에 걸친 진주성 전투이다. 동서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으로 인해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남쪽의 남해안지역으로 침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진주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남해안지역의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특히 2차 진주성전투는 전투를 벌인 장군과 병사들이 대부분 전라도지역의 관군과 의병이라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김천일, 고종후, 최경회 등이 모두 호남지역의 의병장들이었으니 호남의 의병들이 경상도까지 원정해서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런데, 호남지역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웅치와 이치,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단지 호남지역으로 진군하던 왜군을 막아낸 특정한 지역이라는 전적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일까? 바로 여기에 지금의 노령산맥이나 소백산맥 같은 산맥개념이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비밀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우리나라의 중심 산줄기를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등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인식했으며, 이를 정리한 지리서가 산경도이다. 즉, 산경도는 우리나라의 중심 산줄기를 정리한 것이다. 웅치는 호남정맥상에 위치한 진안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이치는 금남정맥상의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진주성은 높은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끝나는 남쪽에 위치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바로 이점에 주의해야한다.

결국, 임진왜란당시 조선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백두대간으로 둘러싸인 호남지역이 지켜짐으로써, 호남지역을 근거지로해서 조선의 식량을 보급하고 의병과 관군이 호남 외 지역으로 출병하여 조선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권율장군의 행주산성 전투도 전라도순찰사로서 권율이 전라도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한양을 재탈환하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원정투쟁을 벌인 결과이다.

과거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높은 산줄기는 사람들의 생활을 나누었고, 사람들은 강을 중심으로 모여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때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등 높은 산줄기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 통행에 불편함이 많았으니, 군사적으로는 천연의 방어막이 되었다. 이러한 천연의 방어막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 웅치와 이치의 전투이며, 이를 이용하지 못한 것이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것이다. 문경새재는 백두대간 고개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산맥 개념인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조상들의 전통적인 산줄기 인식인 산경도의 백두대간, 호남정맥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서려있다. 우리 호남의 선조들은 왜군을 호남정맥의 곰티재(웅치)에서 막아냈고, 금남정맥의 배티재(이치)에서 몰아냈다. 참 쉽다. 우리는 백여 년간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고 있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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