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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산책]<85>사라방드
2009년 10월 08일 (목) 김성희 객원전문기자 artdir@sjbnews.com
   
사라방드 (2003)/ 감독: 잉마르 베리만 /출연: 리브 울만 (마리안), 얼랜드 조셉슨(요한)

영화 <사라방드>는 프롤로그에서 나이 지긋한 마리안(리브 울만)을 지적이고 고상한 이미지로 섬세하게 클로즈업하면서 낮은 첼로 음과 함께 시작한다. 마리안은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펼쳐진 사진들을 여유롭게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하고, 사진 속 인물들과 자신의 지나간 삶의 전환점들을 조망하며 명상에 잠겨 독백한다. 이어서 요한과의 만남 실행, 요한의 여름별장에서의 체류, 안나에 대하여, 헨릭과 요한, 바흐, 원조, 안나의 편지, 사라방드, 절대적 순간, 새벽이 오기 전의 10가지 에피소드들로 영화는 관현악 협주곡처럼 진행된다. 마침내 에필로그에서는 "우리가 함께 나눈 시간은 나른한 기쁨"이었다고 말하는 마리안이 문득 안나의 삶, 사랑, 행동, 느낌 등을 궁금해 하다가, 장애의 고립된 삶을 사는 딸 마르타를 만나고 오며, 처음으로 요한과의 삶에 얽힌 수수께끼를 몸과 마음으로 느낀다. 시종여일 "가족들은 대개 서로 싸우고 이혼하는 법이지요."라고 말하던 절제된 감성의 리브 울만이 장애아 딸 마르타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과 회한으로 감정에 복받쳐 울먹이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다가, 약간 빠르고 높은 첼로음의 '사라방드'곡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인간 영혼에 대한 절망적이고도 통렬한 탐색으로 우리의 상식과 잠자는 영혼을 뒤통수 한 대 때리는 이 영화에서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그림들이 각각 단속적인 것 같지만 그 개별적 이미지들의 중첩은 또 하나의 변주곡이 되어 일종의 관현악 합주곡과도 같은 하나의 영상이 된다. 각각의 개별 독주자들이 엮어내는 협주곡 같은 이 영화는 '전통과 개인의 탤런트'처럼 10개의 에피소드들로 모자이크 처리된 '영화 칵테일'이다. 스페인에서 한 때 외설스럽다는 이유로 금지되기도 했던 17-8세기에 유행하던 2인 1조의 에로틱 무곡인 '사라방드' 선율과 함께, 이 영화에서 잉마르 베리만은 통렬한 힘으로 고통스런 가족 역학을 분해하며, 불멸과 필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차분하게 마리안은 과거 속의 전 남편을 만나려는 오래전부터의 숙원을 실행에 옮긴다. 숙모로부터 많은 유산 상속을 받아 억만장자가 된 마리안의 전 남편 요한은 경치 좋은 오래된 여름 별장에서 한적하게 은거하며 외관상 넉넉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어느 아름다운 가을 날 마리안은 안락의자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던 요한을 가벼운 키스로 일깨우면서 요한의 가족 이야기에 개입한다.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에는 "좋은 우정과 흔들리지 않는 에로티시즘"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어느 신부의 말을 요한이 재인용하는 대목에서, 결혼 생활 중에 요한이 충동적으로 부정한 일을 저질렀던 그 사건으로 자신은 지금도 고통스럽다고 마리안은 32년 만에 실토한다. 아내 안나를 2년 전에 사별한 헨릭은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지금은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으로 오로지 딸 카린에게 첼로 레슨만을 하며 카린의 미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한 듯 살고 있다. 요한과 헨릭은 둘 다 카린에겐 각각 판이한 관점에서 우호적이며 희생적이다. 2년 전에 죽은 헨릭의 아내 안나의 존재는 요한을 위시한 가족 모두에게는 아직도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딸 카린에 대한 몰상식적인 사랑과 구속을 경계하라는 죽은 안나의 편지는 헨릭의 병적인 집착의 정도를 암시한다. 마침내 더 이상 엄마의 대용품으로서 아버지에게 칭찬 받는 존재이고도 싶지 않으며 비정상적인 부녀관계는 끝내겠다고 말하는 카린에게 아버지 헨릭은 다섯 번째 '사라방드' 곡 연주를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카린이 떠난 다음 헨릭은 자살을 기도하지만 미수에 그친다.

한편, 요한은 아들의 아내인 안나를 사이에 두고 아들 헨릭과 묘한 긴장 관계였음을 마리안에게 고백하면서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날 밤 새벽이 오기 전 요한은 취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마리안이 누워있는 게스트 룸을 찾아온다.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의 비통함"과, "신체의 모든 구멍으로부터 나오려고 하는 정신적 설사"같은 고뇌 때문에 죽음이 가장 두렵다고 울며 요한은 바하의 무반주 첼로곡 '사라방드' 곡처럼 인습의 질곡에서 벗어나 마리안의 마음속으로 다가간다. 이 에로틱한 무곡 '사라방드'는 아내를 잃은 헨릭과 딸 카린의 씬에서는 물론, 마리안과 요한의 씬 등에서, 얼핏얼핏 널름거리며 관객의 페티쉬즘적이고 관음증적인 충동에 에로틱한 촉수를 은근히 뻗치더니, '애매성'과 '카타르시즈'라는 극약 처방으로 봉합하여 슬쩍 비틀어버린다. 잉마르 베르만은 이 영화에서 사랑과 증오의 당당한 춤곡, '사라방드'의 리듬으로 가족 관계에 나타난 인간적 번뇌, 갈망, 불안 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때때로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복잡한 심리를 천착하려는 정열과 그 정열을 씻을 수 없게 만드는 능력과, 그리고 무기력하게 증오로 바뀌어가는 사랑의 덧없는 속성 뿐 아니라 사랑의 질식할 것 같은 속성에 대하여 눈 하나 꼼짝하지 않고 면밀하게 파헤치면서 말이다.


/김성희 객원전문기자(백제예술대 방송시나리오극작과 교수, 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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