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산책]<86>가을의 전설
[시네마산책]<86>가을의 전설
  • 새전북신문
  • 승인 2009.10.15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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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설 Legends Of The Fall, 1994

감독 에드워드 즈윅(Edward Zwick), 출연 브래드 피트, 안소니 홉킨스, 에이단 퀸, 줄리아 오몬드

인생을 계절에 빚 대는 것처럼 진부한 표현도 없지만, 가을은 몰락과 상실을 은유하며 어김없이 찾아온다. “한때는 꽃을 사모도 했으나 이제는 잎들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는 하강의 계절 한가운데서, <가을의 전설>은 진한 공명을 울린다. 짐 해리슨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광활한 대지와 세계대전의 전장을 무대로, 전설로 생을 마감한 한 인간과 그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대서사시다. 브래드 피트, 안소니 홉킨스 등 출연 배우의 화려함, 여전히 사랑 받고 있는 제임스 오너(James Horner)의 테마곡뿐 아니라, 대자연의 멋진 영상미를 창조하여 1995년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했다.

미합중국 정부의 인디언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윌리엄 대령은 퇴역 후 세 아들과 함께 몬태나에 정착해 목장을 짓고 살아간다. 장남 알프레드, 둘째 트리스탄, 막내 사무엘, 특히 가을에 태어난 둘째 트리스탄은 거칠고 반항적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주위의 사랑을 받는다. 어느 날 유학을 떠났던 사무엘이 약혼녀 수잔나를 데리고 귀향하면서 형제의 삶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알프레드와 트리스탄이 수잔나에게 연정을 품고, 수잔나는 첫눈에 트리스탄을 사랑한다. 삼형제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사무엘이 전사하자, 트리스탄은 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수잔나는 알프레드와 결혼을 약속하지만, 트리스탄이 돌아오자 잠자리를 같이하고, 알프레드는 배신감에 집을 떠난다. 트리스탄은 역시 다시 방랑을 떠난 후, 수잔나에게 이별 편지를 보내고, 사업가로 성공한 앨프레드는 결국 수잔나와 결혼한다.

러들로우가를 평생 지켜본 원스텝이라는 인디언의 회상으로 짜여진 <가을의 전설>에는 많은 상징을 담고 있다. 늦가을에 태어난 트리스탄은 사냥에서 곰과 격투를 벌여 곰의 발톱 하나를 갖게 된다. 인디언의 전설에 의하면 사람과 짐승이 피를 함께 나누어 흘리면 그 둘은 하나가 된다고 한다. 그 날 이후 트리스탄은 일생동안 자신의 내부에 곰의 야성이 존재하는 운명적인 삶을 살게 된다. 곰은 트리스탄의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로서 일생동안 자기와 투쟁한다. 또한 트리스탄이 동생 사무엘을 죽인 적군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행동은 ‘단칼’이란 인디언의 영향으로 트리스탄이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실제는 아메리카 정복 과정에 백인이 먼저 행해졌다. 이 에피소드는 서구와 비서구의 구별 짓기, 인디언은 야만적이고 잔인하다는 판단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트리스탄의 두 여인 ‘이사벨’ 역시 상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는 어머니 ‘이사벨’에게 어린 시절 버림을 받았고, 인디언인 아내 ‘이사벨’은 경찰이 난사한 총에 맞아 죽는다. 트리스탄에게 있어 어머니와 아내였던 두 명의 이사벨은 소유할 수 없는 여인으로서, 그가 일생에 걸쳐 해결하지 못하는 트라우마(trauma)이다.

개인의 삶이 그러하듯, 가족사 역시 계절처럼 순환하며 성장 · 성숙 · 쇠락을 경험한다. 탄생과 새로운 가족의 유입, 갈등과 치유, 이별과 죽음의 사이클은 후세에게 전설로 전해진다. 꽃을 사모했던 청춘의 봄은 이제 가을을 거쳐, 동면으로 접어든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그 시간은 또 다른 시작을 준비하는 순환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사이클에서 “어떤 이는 크고 분명하게 자신의 내부의 소릴 듣고, 들리는 대로 살아간다.” 흐름을 역행하는 그런 사람은 미치거나, 혹은 전설이 될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곰을 피를 수혈한 트리스탄이 가족 안에 정착하지 못하고 길에서 자신을 치유하듯, 노년의 깊은 가을은 퇴락이며 동시에 전설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가을의 전설>은 경제, 사회적으로 폐쇄적이고 자급적이던 미국이 1차 세계대전과 산업 혁명에 의해 변화의 흐름을 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보다는 자기 길을 묵도하며 격정의 삶을 살았던 자유주의적 영웅 트리스탄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내부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본질에 충실한 주인공들은 인간 우위에 놓인 명분의 허상을 깨트리고, 인종을 초월한 인간애와 우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진실한 사랑과 자아 찾기를 모색하는 벅찬 감동과 강한 카타르시스로 이끈다.

/김혜영 객원전문기자(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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