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은 한 때 불교학을 공부했다. 오늘의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강학원장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 교종 밑에서 불심을 닦았다. 석전스님은 육당 최남선이 가장 가깝게 지냈던 큰 스님이었다.

전주출신의 석전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드물게 보는 큰 학자였다. 석정은 그의 밑에서 비단 불교학뿐만 아니라 시도 배우고 또 일제의 압제밑에서 고통을 겪는 우리민족의 아픔을 생각하는 마음도 익혔다.

석정이 가장 좋아했던 시인은 인도의 타고르와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스님이었다. 특히 만해에 대해서는 스님의 시를 좋아한 것만이 아니고 그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굽힐 줄 모르는 정의감관 지조를 더욱 존경했다.

석정은 만해스님에 대해서 ″그 굳은 신념과 높은 지조로써 일생동안 한발자국도 후퇴한 일이 없는 만해는 그 불사조의 정신으로 영원한 자비를 우리들의 가슴에 심어주었으니 …″라고까지 말 했다. 그래서 만해는 ‘님’을 조국의 상징으로 했지만 석정은 ‘님’대신 ‘어머니’를 통해 조국을 노래했던 것이다.

석정을 흔히 전원 또는 목가시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석정처럼 올곧게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내일을 노래한 시인도 드물다. 그것도 고향 부안땅 청구원에서 말이다. 어쩌면 이 역시 평생 동안 지조로써 단 한발자국도 물러섬이 없었다는 만해의 영향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2시집 ‘슬픈 목가’는 비록 광복 후인 1947년 7월에 간행했지만 수록된 시는 일제 때의 작품이 많다.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숨이 막혔던 속에 써 두었던 작품이 많다. 민족을 읊은 시는 모두 검열에 걸려 발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와 /하늘과/하늘 아래 푸른 산 뿐이로다//꽃 한 송이 피어낼 지구도 없고/ 새 한 마리 울어 줄 지구도 없고/ 노루 새끼 한 마리 뛰어다닐 지구도 없다//나와! 밤과/무수한 별뿐이로다/밀리고 흐르는 게 밤 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 하늘이드뇨. ― 슬픈 구도



라고 외쳤다. 그야말로 ‘밤이 이대로 억만년이야 가겠느냐’고 때로는 자위도 해 보았지만 우리 겨레를 휘감고 있는 어두운 밤은 좀체로 여명을 약속할 것 같지 않았다고 밤마다 가슴을 쥐어 뜯기도 한 것이다.

이밖에도 석정이 민족의 암혹기에 노래한 시는 너무도 많다. 예를 들면, ‘들길에 서서’에서는

″뼈에 저리도록/ 생활을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푸른 별을 바라보자 …″

고 했고 또,

″새해가 흘러와도/ 새해가 밀려가도/ 마음은 밤이란다/언제나 밤이란다/(중략) 막막한 이 한밤이/ 천년을 간다해도/ 만년을 간다해도/ 밤에서 살으련다/ 새벽이 올 때가지/심장처럼 지니고/검은 밤을 지니고″ ― 밤을 지니고





등등 많다.

석정은 비록 시골에 묻혀있는 시인이었지만 당시 정지용(鄭芝溶)과 이태준(李泰俊)이 주재한 ‘문장’과 연결을 갖고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특히 ‘봄은 전보도 안치고’라는 새로운 감각으로 시단에 샛별처럼 나타났던 편석촌 김기림(片石村 金起林)과는 각별한 우정관계를 맺었다.

석정시인은 평생을 ‘촛불’과 ‘슬픈 목가’에 이어 ‘빙하’(氷河), 그리고 1969년 회갑 때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까지 5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밖에 옛 조선시대 부안의 명기 ‘이매창시집’과 ‘당시’(唐詩) 번역본도 남겼다.

석정은 1973년 12월, ‘전북문화상’ 심사중 고혈압으로 몸이 불편하게 됐다. 이 때부터 7개월간 투병을 했다. 그럼에도 석정은 시만을 생각했다. 그는 병석에서도,



″백목련 햇볕에 묻혀 눈이 부시어 못보겠다/ 희다 지친 목련꽃에 비낀 4월 하늘이 더 푸르다/ 이맘 때면 친구 불러 잔을 기울이던 꽃철인데/ 문병왔다 돌아서는 친구 뒷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에 무더기로 떨어지는 백목련 낙화 소리 ….

―‘가슴에 지는 낙화소리’



라고 고독을 노래했다. 실로 가슴이 뭉쿨하다. 제자이자 시인 허소라(許素羅) 교수는 이시에 ″목숨의 강 이편과 저편 사이의 고독이 너무나 뼈에 스미도록 새겨져 있다. 문병와서 아무리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해준들 그들은 결국 강 건너 사람들이다.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이승과 저승의 낙차가 너무도 환하게 보여 온 것″이라고 했다.

시력(詩歷) 50년,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걱정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과 서정을 노래한 석정시인은 1973년 10월, 대한민국 예술문학상을 받았다. 그는 1974년 7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7세였다.

/이치백(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ㆍ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