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산책]<128>허공에의 질주
[시네마 산책]<128>허공에의 질주
  • 김혜영
  • 승인 2010.12.23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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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공에의 질주(Running On Empty, 1988)

낮고, 낯선 울림으로 말 걸기

<허공에의 질주>(1988년)는 반전운동으로 인해 탈주자가 된 가족의 갈등과 화해를 그리고 있다. 신념을 가진 자들의 영원히 잡을 수 없는 꿈을 향한 탈주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던 70년대 초, 폭탄 연구소를 파괴한 혁명가 가족에게 삶 자체가 도피와 불안의 연속이다. 목숨을 건 탈주와 그들을 뒤쫓는 국가권력의 추적이 15년 동안 아슬아슬하게 교차한다. 여전히 FBI 감시의 표적인 부모 때문에, 대니(리버 피닉스)와 동생 해리 모두 매번 이름을 바꾸며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머물렀던 곳을 떠난다. 부모와 함께 6개월마다 이름과 머리 색깔을 바꾸면서 살 수밖에 없는 두 아들에게 일상은 잠행과 추적으로 얼룩져 있다. 조이듯 다가오는 경찰과, 그것을 의식하고 탈주하는 가족, 모친이 암으로 돌아가신 것조차 한참 뒤 ‘암호’로 전달받고 오열하는 대니의 아버지는 그들에게 ‘사람’으로 기능하는 것이 가능하지 의문을 갖게 한다. 부모와 함께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전전하며 사는 아들은 속 깊은 우정을 나눌 만한 친구도, 애틋한 첫사랑도, 미래에 대한 꿈도 키울 여유가 없다.


불안과 유머가 교차하는 일상

그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신념을 지켜 나간다. 힘든 상황이 닥칠 때마다 이들은 서로를 보듬으며 위태로운 존재조건을 이어간다. 미래를 향한 공포가 삶을 위협할지라도, 일상은 불안과 우울보다는 유머와 열정으로 가득하다. 도피가 곧 일상일 정도로 잠행에 익숙하지만, 가족은 활기차게 살아가며, 젊은 시절의 신념을 잃지 않는다. 행복의 절정은 엄마의 생일에서 빛을 발한다. 대니의 여자 친구에게 조개껍질 목걸이를 선물 받았을 때, 눈물을 글썽이는 대니의 엄마와 가족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값지게 누린다. 스치는 일터마다 노조와 세미나를 만드는 엄마, 어릴 적부터 두 아들에게 혁명 의식을 교육하는 아빠,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불가능할 것 같은 미래를 설계하는 아들. - 열여덟 살이 된 큰 아들 대니는 신념으로 뭉친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부터 마음이 흔들린다. 줄리아드 음대에 진학하려면 탈주자의 굴레를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가족을 지키면서, 동시에 자신의 꿈도 배반하지 않으려는 대니의 갈등이 시작된다. 가혹한 운명은 애처롭지만 힘든 선택과 결정의 모든 순간은 철저하게 아름답다.


시드니 루멧 감독과 리버 피닉스

1924년 출생한 <허공으로의 질주>의 시드니 루멧 감독은 <12인의 성난 사람들>(1957)로 데뷔한 뒤 <뜨거운 오후>(1975), <네트워크>(1976) 등을 만들었다. 가족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연극을 영상으로 옮겼으며, 드라마, 코미디, 로맨스, 뮤지컬 등 폭넓은 장르를 소화한 감독이다. 특히 멜로드라마의 관습에 의존하면서도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만들어갔다. 여타의 헐리웃 영화들처럼 단순하게 따스한 가족애를 강조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시공간에 피투(被投)된 개인의 갈등과 선택을 담아내고 있다. 그는 저예산 영화를 선호했으며, 제작기간과 예산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동 창작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 김혜영
그러나 무엇보다 <허공에의 질주>는 이미 고인이 된 청춘스타 리버 피닉스의 앳된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실제 열여덟 살 때, 자신과 동갑내기 주인공 대니를 연기한 배우 리버 피닉스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피아노 솜씨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늘한 눈빛으로 “음악은 내 인생이야.”라는 대사 한마디로 청춘의 오만함과 열정을 너무나 간략하게 정리하여 보여준다. 대니로 분한 리버 피닉스는 주체적 결단으로 선택한 삶에 대하여 낮고 낯선 울림으로 답한다. 일상의 막다른 골목에서 조차 유머를 잃지 않는 그에게 잠행과 탈주는 친구이고, 위험의 순간은 축제이다.


/김혜영 객원전문기자(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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