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산책]<130>커피와 담배
[시네마 산책]<130>커피와 담배
  • 김혜영
  • 승인 2011.01.06 15: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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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게. 둘을 함께하면 끝내준다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천사에서 인간이 된 ‘다미엘’이 듣게 되는 조언이다. 카페인과 니코틴은 영원한 천상의 삶을 버리고 지상을 선택한 천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유한한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을 상징하는 사물들이기도 하다. 웰빙이 시대 코드로 읽히는 이즈음, 카페인과 니코틴 예찬이라는 역설을 담아낸 짐 자무시의 영화는 ‘소통 부재’의 열쇠로서 커피와 담배를 이야기한다. 우리에겐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담뱃불을 빌리고 커피 자판기의 모자란 동전을 자연스럽게 얻던 시절이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자리에 커피와 담배가 있고, 쏟아지는 일상의 생산적이지 않은 무수한 잡담들 속에도 커피와 담배가 있다.

커피와 담배 사이로 상대에 대한 애정, 유머가 틈새를 비집고 흘러 다닌다. 이러한 소통의 매개체를 소재로 열한편의 단편을 엮어서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가 탄생하였다. 1986년부터 2002년까지 17년 동안 틈날 때마다 만들었던 단편들은 그 어떤 영화보다 짐 자무시의 영화적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4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가장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성황리에 상영된 바 있기도 하다. 커피와 담배는 열한편의 단편을 잇는 매개 역할을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좁은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올려놓고 담배를 마주 피우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로만 진행된다. 각각의 단편을 만든 때와 장소, 스탭과 배우가 모두 다르지만, 대화 상대의 부재라는 주제 하나로 전체 맥락을 아우른다.

매 단편의 배경은 답답한 카페 안이다. 그 공간에서 둘 혹은 셋의 인물을 중심으로 대화와 독백이 이어진다. 카메라는 정중앙에서, 담배와 커피 잔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테이블에 포커스를 맞춘다. 커피를 젓는다거나, 주사위를 던지는 손이 등장하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는 없지만, 등장인물이 허름한 커피숍에 앉아 나누는 사소한 대화는 일상 사이의 미묘한 비일상을 드러낸다. 수다는 때론 지루하지만, 때론 유쾌하다. 다소 엉뚱하고 뜬금없는 이야기는 한 켠 지적이고 매력적이다. 자칫 지루할 것 같은 설정은 유머와 아이러니 가득한 대화를 통해서 유쾌함으로 나아간다. 등장인물들이 사랑스럽게 느껴진 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커피와 담배를 가지고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소통 부재에서 발생하는 유머와 아이러니

<자네 여기 웬일인가?>에서 로베르토는 카페인에 중독된 사람처럼 손을 덜덜 떨면서 커피예찬을 하더니, 잘 알지 못하는 스티븐을 대신해서 기꺼이 예약되어 있는 치과에 간다. 투닥거리며 다투는 <쌍둥이>는 웨이터의 질문에 동시에 엇갈리는 대답만 한다. 어느새 웨이터는 서로 스타일을 베꼈다고 다투는 쌍둥이와 함께 수다를 떨고 있다. <캘리포니아 어딘가>에서 담배를 끊었다는 두 남자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의지박약아들이라고 비웃으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담배를 오랫동안 끊었으니 한 개비 피워도 괜찮다."며 서로의 담배에 불을 붙여준다. <담배는 해로워>에서는 커피를 너무 좋아하는 노인이 맞은 편 노인에게 담배의 해로움을 강조하며 잔소리를 한다. <별일 없어?>는 오랜만에 친구인 알렉스가 아이작을 불러내자, 아이작은 알렉스에게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계속 끈질기게 물어본다. 결국 알렉스는 “뭐라도 잘못되길 바라는 거야?”라고 불같이 화를 낸다. <샴페인>에서 노인 둘이서 “세상에의 궤적을 놓아버린 것 같아” 라고 슬퍼하며 귀에 손을 가져다 대자,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맛없는 커피를 샴페인으로 생각하면서 건배를 한다.

<커피와 담배>는 속도에 대한 저항하며,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다. 고급 취향을 과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은 과연 ‘중독자’다. 주인공들 어느 누구도 감히 담배와 커피를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커피 중독으로 정신착란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커피를 포트 째 들이키는 빌 머레이가 커피와 담배에서 위안을 찾는 이들의 어깨를 두드려준다. 영화의 특별한 설정은 배우들이 모두 자신의 실명을 사용함으로써 배역과 동일시된다는 점이다. <쌍둥이>에 등장하는 웨이터 스티브 부세미, <사촌>에서 전혀 다른 양 극단에 있는 두 여자를 1인 2역으로 완벽하게 소화해낸 케이트 블란쳇, <흥분>에서 코믹 연기를 보여준 빌 머레이 등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웃음과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짐 자무시는 빔 벤더슨 감독의 후원으로 성장한 뉴욕대 영화과 출신으로, 첫 장편영화인 <영원한 휴가>를
▲ 김혜영
발표하면서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단편과 장편, 흑백과 컬러, 유럽 예술영화와 미국 대중 문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독특한 영화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짐 자무시는 주로 후기 산업 사회의 인간소외를 주제로 한 영화를 만들어 왔다. 그는 <천국보다 낯선>, <데드맨>, <고스트 독>, <브로큰 플라워> 등을 통해서 일상에서 만나는 비일상, 소통 부재에서 발생하는 유머와 아이러니가 담긴 색다른 영화들을 선보여 왔다. 여전히 형식적 실험에 끈질긴 관심을 견지하는 그는 예술 영화 마니아와 영화학도들의 우상으로 각광받고 있다. <커피와 담배>는 아직까지 짐 자무시의 '뼈 있는 농담'을 만나보지 못한 관객에게 추천하고 싶은 영화이다.

/김혜영 객원전문기자(전북비평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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