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산책] 썸머 스토리(A Summer Story, 1988)
[시네마산책] 썸머 스토리(A Summer Story, 1988)
  • 김성희 객원전문기자(백제예술대 교수·전북비평포럼)
  • 승인 2011.09.01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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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피에스 해가드, 각본-페네로피 모티머, 출연-이모겐 스텁스, 제임스 윌비, 소피 워드, 수잔나 요크

<썸머 스토리>는 도시 엘리트인 청년 변호사, 프랭크 애셔스트(제임스 윌비 분)와 순박한 시골 처녀, 메간(이모겐 스텁스 분)과의 지나간 사랑 이야기를 목가적인 여름 풍경화로 그리고 있는 멜로드라마다. 193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존 갤스워시가 원작 소설 <사과나무>에서 주인공 프랭크의 심리적 변화를 치밀하게 추적 묘사하는 사실주의 작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듯이, 영화 <썸머 스토리>에서도 피에스 해가드는 노신사 제임스 윌비의 비정하리만치 객관적인 표정 이면의 섬세한 떨림으로 보는 우리의 가슴과 귀를 오랫동안 먹먹하게 한다. 존 갤스워시의 원작에서는 메간이 물에 빠져 자살하지만, 피에스 해가드의 <썸머 스토리>에서 메간은 도시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 프랭크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 비정한 결말 역시 어쩌면 이 시대의 흔하디흔한 멜로의 진부한 자살 유형인지도 모른다.

▲ 김성희 객원전문기자(백제예술대 교수·전북비평포럼)
시골 황무지 사거리의 도로와 오솔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뗏장이 덮인 나지막한 무덤 하나, 그 무덤 위의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흩어진 산사나무가지와 블루벨 꽃 한줌! 은혼식의 나이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충실한 반려자인, 감상적인 아내 스텔라와 야외에 소풍 나온 노신사 프랭크 애셔스트, 그 작은 무덤을 보며 중얼거린다, "십자로의 무덤이라! 이건 자살한 사람의 것이로구나! 미신에 사로잡힌 가엾은 세속적 인간들이라니! 근데 이 자리의 무덤 주인은 복도 참 많구만! 공허하게 조각 장식된 보기 흉한 평범한 무덤이 아니라, 이리도 전망 좋은 곳에 탁 트인 하늘과 오고가는 숱한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있으니 말이야!"라고. 곧 이어 아름다운 시골 풍경에 감탄하며 스케치에 몰두하는 아내 스텔라 곁에서 노신사 프랭크 애셔스트는 돌담에 기대고 앉아서 아찔한 봄꽃들에 둘러싸여 혼자만의 아뜩한 회상에 잠긴다.

런던의 젊은 변호사 시절, 프랭크는 의사 친구와 함께 아름다운 휴양지 토오키로 여름휴가를 나왔다가 발목 부상 때문에 인근 다트 모아의 어느 시골농가에서 며칠을 보낸다. 그 친구는 먼저 떠나고 프랭크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시골 처녀 메간의 친절한 치료를 받으며 혼자서 며칠 더 머문다. 인생 '호우시절'에 낯선 여행지의 절경에서 그야말로 첫눈에 반한 메간과의 아찔한 사랑에 빠진 프랭크, 런던으로 가서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와의 사랑의 도피 자금 마련을 위해 은행이 있는 인근의 해변 휴양지 토오키로 나간다. 그곳에서 프랭크는 시내를 배회하다가 우연히 만난 중학교 동창 필의 여동생 스텔라를 소개 받게 되고, 결국 메간과의 '굳은(?)' 사랑의 맹세는 흔한 멜로의 버려질 티켓으로 전락한다. '그게 뭐 대수라고! 그깟 키스 몇 번 가지고! 한 달만 지나면 다 잊어버릴 텐데!'라고 자위하며 불면의 잠을 청하는 프랭크 애셔스트, 마침내 스텔라를 택하게 되고, 은발의 노신사로 돌아와 찾은 그 시골길에서 옛사랑 그녀를 초라한 무덤으로 만난다.

프랭크와의 약속 장소 부근에서 낯선 거리를 방황하는 메간의 시선을 피하며 프랭크가 숨죽이고 미행하는 장면들과, 딥포커스의 롱샷에 잡힌 멋진 풍광의 시퀀스들에 마음과 두 눈이 모두 충전된 느낌이다.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그녀의 무덤입니다. 저 무덤 속 처녀도 이 마을에 친구가 있었습지요. 가엾은 처녀인데... 그 처녀, 가슴에 손을 대며 '여기 이 가슴이 아파요.'라고만 말했지요. 그리곤 '만일 제가 죽게 되면, 전 이 사과나무 밑에 묻히고 싶어요.'라고만 종종 말했습지요.” 애셔스트, "정말 이렇게 십자로에 묻다니 아직도 여긴 그런 풍습이 지켜지고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죽어서 십자로에 묻혀서도 멎을 것 같지 않은 그 아픈 통증은 훗날 모르는 행인들의 발아래서라도 밟혀야 통증이 멎을 것 같아서인가! 옛 기억에 젖어 씁쓸한 기분으로 귀가하는 프랭크, 차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는 프란시스를 보며 직감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저 아이가 바로 그녀가 낳은 내 아들이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이미 그것도 자동차 백미러 너머로 사라지는 덧없는 풍경이다. 아들이 아버지인줄도 모르고 손 흔드는 라스트씬이라니! 소금을 흩뿌려놓은 것 같은 달빛 아래 메밀꽃 흐득한 밤길을 가는 허생원과 오버랩되며 앤딩 크래딧이 다 올라가도록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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