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그바람위를놀다
변산,,,, 그바람위를놀다
  • 김판용 시인
  • 승인 2012.04.19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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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용 시인의 여행이야기]부안 변산
▲ 수성당 가는 길에 핀 유채꽃
여행은 계획을 세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작정 떠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에 여정을 잡기도 하지만, 누군가 초청을 하는 경우도 있다. 누가 초청을 한다면 더 할 수 없이 좋지만 그런 경우가 그리 흔치는 않다. 초대할 경우 상대가 좋아하는 분위기나 여행지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뒷받침 돼야 한다.

이번 변산 여행이 그랬다. 이야기를 좀 거슬러 올라가면 지난 여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갔다 오던 길에 좀솜에서 가족들을 만난 인연으로 전주에서 일한다는 샨띠(Santi Baniya)라는 히말라야 아가씨를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어렵게 한국 생활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문화답사에 초대를 했다. 한국 문화도 알리고, 비용도 만만찮은 여행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그 사실 알고 부안군청에 근무하는 김성원 선생이 산띠를 초대하겠다고 하더니 꽃피는 봄날을 잡아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덕분에 히말라야를 같이 걸었던 친구와 함께 김성원 선생이 잡아주는 길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참 오랜만에 홀가분한 여행이었다. 김성원 선생은 부모의 고향이 부안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은 서울에서 나서 자랐고 공부도 역시 서울에서 마쳤다. 그러다가 운명처럼 부모의 고향에 공무원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의 부안 사랑은 용광로보다 뜨거워 보였다. 부안의 작은 길이며, 나무 한그루까지도 꿰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패드를 차에 장착해 동영상과 계절별 사진을 보여주면서 현장을 설명하곤 했다. 열정과 아이티(IT)로 무장한 전천후 가이드였다.

우리를 태우더니 군청 옆의 서문안당산으로 안내했다. 부안의 문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 중에 하나가 당산과 당산나무다. 이런 당산이 비교적 도심 한가운데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앙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통유적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시킨 새마을운동을 견뎌낸 힘은 바로 주민들이 갖는 경외감이었을 것이다.

계회도로 차를 몰았다. 조선시대에는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관하의 격포진(格浦鎭)에서 봉화가 오르면 이곳 계화도에서 불이 올라 한양으로 올라갔다. 지금도 계화산(246m) 정상에는 그 봉수대가 남아있다. 영화 <실미도>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계화도는 원래 섬이었다. 육지로 바뀌기까지는 해방 이후 가장 큰 간척사업 때문이었다. 그래서 새만금의 전신으로 불린다. 운암댐을 막아 섬진강 물을 청호저수지로 끌어들여 경작을 했고, 또 그 댐의 수몰민 2700여 세대를 이주시켰다. 우리 현대사의 개발의 상처와 영광을 안고 계회도 역시 봄꽃에 잠든 듯 조용해 보인다.

새만금 방조제를 잠시 돌아본 후 본격적인 변산 마실길로 접어든다. 전국의 수많은 곳을 달렸으나 아직 변산반도를 도는 바닷길만큼 아름다운 길은 보지를 못했다. 육지 쪽으로 눈을 돌리면 수려한 산세가 눈부시고, 바다 쪽으로 눈길을 주면 기암과 어우러진 맑고 확 트인 대양이 넘실거린다.

우리의 마실길 여정은 고사포해수욕장에서 시작이다. 고사포는 모래가 곱고, 송림이 우거져 있으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또 국립공원이라서 쉽게 야영을 할 수도 없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2Km쯤 떨어진 하섬까지 썰물 때면 바다가 갈라진다. 그 길을 따라 조개를 캐거나 소라를 줍는 사람들이 많다. 이번 여행에 초대 받은 샨띠의 나라 네팔은 바다가 없다. 더구나 그가 사는 동네는 히말라야다. 한국에 와서 바다를 봤다는 산띠가 너무 좋아했다. 바다라는 사실만으로…….

드넓은 바다를 보기에 한없이 좋은 날씨더니 햇볕이 강해지자 바다 안개가 올라온다. 해무는 마치 점령군처럼 육지를 향해 말려오며 순간에 바위와 나무를 지워버린다. 지우개로 스케치한 그림이 지워지듯 그렇게 눈앞에서 풍경이 사라져 간다. 어떤 것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도 놀랄 일이지만, 순간에 사라지는 것 또한 몽환적이다.

그 해무를 벗하며 가다가 두 그루의 노거(老巨) 팽나무를 만났다. 팽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당산나무로 섬김을 받던 나무이다. 주로 바닷가 마을일수록 팽나무가 많다. 바닷바람에 한쪽으로 굽어 서있는 나무의 모습이 평생을 함께 늙어가는 부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팍팍하고 거친 사막을 지나 바람 부는 언덕에서 잠시 쉬고 있는 두 마리의 낙타 같기도 하다. 같이 길을 간다는 것은 저리 말없이 한 곳을 보며 서 있는 것이리라.
▲ 여행을 초대한 김성원선생(오른쪽)과 히말라야 아가씨 샨띠(가운데)


△히말라야 아가씨, 샨띠에게 바다를 주다.

죽막동(竹幕洞)을 지난다. 이곳의 파도는 유난히 거세다. 그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에 칠산(七山)바다를 관장하며 마을과 어민들을 지켜주는 '개양 할미'를 모신 수성당(水聖堂)이 있다. 수성당은 당집이다. 자료에 의하면, 아주 먼 옛날에 이 수성당 옆의 여울굴 속에서 개양할미가 나와 딸 여덟을 낳고, 각 도에 한명씩 보내고 막내딸만을 데리고 살았다 하는데 그래서 수성당을 구낭사(九娘詞)라고도 불리었다.

개양 할미는 키가 어찌나 크던지 나막신을 신고 서해 바다를 걸어 다니며 깊은 곳을 메우고 위험한 곳에 표시를 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기도 많이 잡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다가 곰소 앞 바다의 '게란여'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얼마나 깊던지 치마자락이 물에 젖었다. 이에 화가 난 개양할미는 육지에서 흙과 돌을 치마에 담아다 게란여에 부었으나 메워지지 않았다. 부안지방에서 깊은 곳을 말할 때 '곰소 둠벙 속 같이 깊다'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죽막마을 사람들은 수성당의 할미를 잘 받들어야 마을이 풍요롭고 안녕하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매년 정월 보름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내 개양할미를 위로한다. 그러나 일부 무속인들이 아무 때나 함부로 당제를 지내는 바람에 화재는 물론 훼손의 위험이 높아 금지한다는 표지판이 서있다. 어쩌면 그 지각없다는 무속인들이야 말로 개양할미의 영험을 제대로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격포로 향한다. 격포항 옆 해넘이 공원에서 건너편 방파제까지 걷기 좋게 다리를 놓았다. 바다 안개에 아스라이 뻗어 있는 나무다리를 걷노라니 바다 위를 밟고 선 기분이다. 전설의 개양할미가 바다를 걸어 다녔다는데, 지금의 토목기술은 사람 몸만 가누며 걷는 것이 아닌 아예 차를 몰고 먼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지경이 되었다. 전설의 신(神)도 이제는 별것 아닌 세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사람이 위대해지는 것인지 돌아볼 일이다. 신을 무시하면 인간은 강해지는 것인가?

격포 군산회관에서 백반으로 점심을 했다. 몇 년 전 KBS의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이곳에서 주로 식사를 했던지 연예인들의 싸인이 즐비하다. 주로 ‘맛이 끝내준다’는 찬사 일색이다. 하긴 주인이 싸인해 달라는데 인기를 먹고 사는 연예인들이 극찬을 마다할 리 없다. 그래서 그런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이 붐빈다. 자기들만의 스토리텔링 없이도 그저 TV 드라마나 맛집에 나왔거나 연예인들이 찾았다는 것만을 내세워도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을 보면 씁쓸해진다.

‘모항을 아는 것은 / 변산의 똥구멍까지 속속들이 다 안다는 뜻이거든 / 모항 가는 길은 우리들 생이 그래왔듯이 구불구불하지’ 우리가 잘 아는 안도현의 시 <모항 가는 길>의 한 구절이다. 모항(茅港)은 띠가 많이 나는 한적한 포구였다. 그러던 모항이 상전벽해가 되었다. 조그맣고 아름다운 마을에 호텔과 수련원이 오더니, 으리으리한 집들이 들어섰다. 80년대 모항을 찾았다가 늦은 점심으로 가게에서 라면을 시켜먹었던 때가 생각난다. 김이 모락모락 나던 라면가닥 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그 파란 겨울 바다가 원시처럼 출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박형진 시인의 집에서 전북작가회의 정기총회가 있었다. 김용택, 안도현, 그리고 고인이 된 심호택, 박배엽 시인 등과 함께였다. 이곳에서 배를 굴리는 박형진 시인의 친구가 잡아온 광어회를 안주 삼아 밤새워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셨다. 그때의 사람들이 생과 사가 다르고, 서로의 계산이 다르듯 모항 또한 그렇게 변했다. 어찌 사람은 변하면서 자연만 그대로 있기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울긋불긋 꽃 대궐이라, 내소사

마지막 여정은 변산의 배꼽인 내소사이다. 어찌 내소사를 짧은 필설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시원하게 뻗은 전나무길은 사람으로 인산인해다. 꽃이 피는 계절이니 상춘객이 많아진 탓이다. 뒷산과 어울리게 지붕을 배치한 절집은 자연을 그대로 닮았다. 자연에 기대어 지은 건물은 아름답다. 내소사의 대웅전과 설선당은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없이 아름다운 집이다.

대웅전에 들어갔다. 공포로 짜올려진 아름다운 포작도 그렇고, 천정에 새겨진 만다라 꽃 위로 문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극락으로 가는 문을 여는 고리다. 그러나 이 절집의 극치는 꽃문창살이다. 꽃문살이 새겨진 많은 분들을 보았지만 정교함과 균형감, 그리고 단아함까지 더해진 내소사의 꽃문살보다 더 아름다운 문살을 나는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어떤 심성 착한 목공이 한 칼 한 칼 대장경을 새기듯 이 문에 화문을 새겨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에만 꽃이 아니다. 경내에는 꽃들의 각축장이다. 벚꽃과 홍매가 어우러지고, 여기에 목련까지 겹쳤으니 그야말로 꽃대궐이다. 히말라야의 처자 샨띠를 대웅전 처마에 두고 꽃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언젠가 그녀가 다시 히말라야에 돌아가 자신의 성지에서 마니차를 돌리며 변산의 바다와 산, 그리고 유서 깊은 내소사의 아름다움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부안을 사랑하는 김성원 선생이 샨띠와 우리를 초대한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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