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전북신문

[시가 있는 이야기] 신석정 시인 - '전아사'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02.01.18 14:25

-전아사-포옹(抱擁)할 꽃 한 송이 없는 세월을얼룩진 역사(歷史)의 찢긴 자락에 매달려 그대로 소스라쳐 통곡하기에는 머언 먼 가슴 아래 깊은 계단(階段)에도사린 나의 젊음이 스스러워 멈춰 선다. 좌표(座標) 없는 대낮이 밤보다 어둔 속을 어디서 음악(音樂) 같은 가녀린 소리 철그른 가을비가 스쳐 가며 흐느끼는 소리 조국(祖國)의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소리 또는 목마르게 그리운 너의 목소리 그런 메아리 속에 나를 묻어도 보지만, 연이어 달려오는 인자한 얼굴들이 있어 너그럽고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두 손 벌려 차가운 가슴을 어루만지다간 핏발 선 노한 눈망울로 하여 다시 나를 질책(叱責)함은 아아, 어인 지혜(智慧)의 빛나심이뇨! 당신의 거룩한 목소리가내 귓전에 있는 한, 귓전에서 파도처럼 멀리 부서지는 한, 이웃 할 별도 가고, 소리 없이 가고, 어둠이 황하(黃河)처럼 범람할지라도 좋다. 얼룩진 역사에 만가(輓歌)를 보내고 참한 노래와 새벽을 잉태(孕胎)한 함성(喊聲)으로 다시 억만(億萬) 별을 불러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리라. 새벽 종(鐘)이 울 때까지 창을 겨누리라. -시집 ‘산의 서곡’(1967)에서 전문발췌 석정을 아십니까?. 그의 생애를 감싼 얼룩진 역사, 포옹할 꽃 한 송이 없었던 세월을 아십니까?. 촛불 하나를 켜는데도 어둠과 함께 돌아오는 어린 새 새끼들을 염려하고,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그 먼 나라를 동경하던 젊은 시인이 아니라, 대낮인데도 밤보다 어둡게 느껴진다며 통곡하던 중년시인 석정을 아십니까?. 그는 아득한 햇무리를 타고 오는 그리운 목소리, 연이어 달려오는 ‘당신’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국의 부름 같은 그 ‘거룩한 목소리’가 있는 한 그는 세상을 어둡게 하는 사탄의 가슴에 창(槍)을 겨누고 싸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얼룩진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 어서 새벽을 맞이하고 싶었겠지요.시 ‘전아사’는 순수시적 경향의 시인으로만 알려진 석정의 역사의식을 가늠케 하는 시입니다. 그는 암담한 시절에 처해 목가적인 시만 읊기에는 너무도 뜨거운 가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첫 시집 ‘촛불’(1939)에서 식민치하의 어둠과 절망 그리고 낙원에대한 동경을 노래한 시인은 ‘슬픈 목가’(1947)에서는 이러한 꿈들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삭막한 현실과 정면으로 대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해방과 6·25의 격랑을 거치면서 시의 여성적 정조(情調)는 남성적인 기개로 변해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부정을 깨우치려는 저항의 목소리를 내게 되지요. ‘빙하’(1956)와 ‘산의서곡’(1967) 등이 그런 작품들이 아닌가 싶습니다.위의 시는 1961년도에 삼남일보에 발표되었다가 67년도에 발간된 시집 ‘산의서곡’에 실린 작품으로 일제 치하라는 암흑의 긴 세월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지럽기만 한 60년대 초 조국의 현실상황을 바라보는 시인의 역사 인식을 엿보게 하는작품입니다. 신석정 시인은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풍의 목가시인으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평생을 전북 지방에서만 지냈던 시인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향토시인이지요.시인이 태어난 곳은 부안읍의 묏부리인 상소산 기슭의 동중리 한 조그만 초가였습니다. 그의 부친 신기은은 전양재 문인의 학자였으며 그는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본명은 석정(錫正)입니다. 그가 읍내 보통학교를 졸업한 것은 열일곱 살 나던 해였습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불의나 비리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6학년 때 수업료를 안 낸다고 일본인 담임 선생님이 미납생 한 명을 전체 학생앞에서 옷을 벗긴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 석정은 전교생을 동원하여 스트라이크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을 받았다가 다음해 3월 겨우 복교를하였답니다. 석정이 정규 교육기관을 통해 받은 교육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소년시절의 석정은 고향의 아름다운 언덕에 올라 먼 바다의 황혼을 바라보며 시심을 키웠습니다. 그리하여 17세가 되던 1924년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라는 작품을 투고, 최초로 활자화되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1930년 3월 그는 보다 큰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 동대문 밖 개운사 대원암조선불교중앙강원(동국대 전신) 박한영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젊은 원생들과 함께 문학회람지 ‘원선’을만들면서 불경을 배웠습니다. ‘시문학’이 창간되던 그 해 시문학사 박용철을 만나게 된 석정은 정지용, 김기림과도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이듬해 다시 낙향하기까지 1년동안 그는 이광수와 한용운을 만나고 문단의 선배동학들과 친교를 맺는 등 그의 문학에 있어 매우 뜻 깊은 한해를 보냅니다. 그는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1931년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하면서 시문학동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석정은낙향을 결심하고 맙니다. 불도보다는 노장사상에 더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소작농을 하여 얻은 벼로 선은동에 초가 하나 사서 '청구원'이라 명하고 살았습니다. 청구원 생활은 첫시집 '촛불(1939)'과 두번째 시집 ‘슬픈목가’(1947)에 그대로 담겼습니다. 피안 저쪽의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꿈꾸듯 그려졌지요. 그러나 이 목가의 신화도 점점 암담해가기만 하는 역사적 현실에서 암울한 분위기를 띠어 갔습니다. 그의 목가는 점점 ‘슬픈 목가’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해방이되었으나 그의 가난한 생활이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1930년대 초부터 서로 문통을 하다가 동서간이 된 장만영이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으나 석정은 끝내 서울행을 단념했습니다. 1951년 전주로삶의 근거지를 옮긴 그는 태백신문사에서 3년 간 편집고문으로 있었고, 그 뒤 전주고와 김제고, 전주상고 등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전북대학교, 영생대등에서 시론을 강의하였습니다. 이때 시집 빙하와 산의 서곡이 발표됐습니다.석정의 후기 시관은 초창기와는 많은 변화를 보입니다. 가난에 대한 인간주의적인 동정과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지사적인 열정이 그로 하여금 역사를 직시하게 만든 것일까요."고독과 절망과 허무를 배설하는 것을 유일한 순수문학인 것처럼 나르시스적 대화를 일삼으며 살아가는 것을 오늘날 시인의 예의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이제야 ‘전아사’를 그리고 ‘영구차의 역사’를 쓴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6.25동란의 비극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한 그의 생애를 알게 된 것도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주었습니다. 그는 비사벌초사에 기거하면서 유네스코와 예총 활동을 펼쳤으며, 많은 후배 문인들을 키워냈습니다. 비교적 생활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알게 해주는 시집이 제5시집 ‘대바람 소리’입니다. 초기의 목가적인세계로 회귀하면서 더욱 차분하고 고요한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지요. 그러나 그의 이러한 회귀는 먼 나라로의 여행에 대한 준비였나 봅니다. 1973년 12월전북문화상 심사를 하는 자리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석에 눕게 된 그는 이듬해 7월 6일 비가 눈물처럼 떨어지던 날 68세의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니었으나 그는 끝내 어둠이 가야 할 밤길을 먼저 걷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밝혀야 할 길이라도 있었던 것일까요./이란우기자 ranwoo@<신석정 연보>▲1907년 부안읍에서 출생 ▲1924년 조선일보에‘기우는 해’발표 ▲1930년 중앙불교전문강원 입학 ▲1931년‘시문학’에‘선물’발표 ▲1939년 처녀시집‘촛불’발간 ▲1947년 제2시집‘슬픈 목가’발간 ▲1954년 전주고 교사 ▲1955년 이후 전북대 등에서 강의 ▲1956년 제3시집‘빙하’발간 ▲1958년 전라북도 문화상 수상 ▲1961-1972년 김제고·전주상고 교사 ▲1967년 예총 전북지부장,제4시집 ‘산의 서곡’발간▲1968년 한국문학상 수상 ▲1970년 제5시집 ‘대바람 소리’ 출간 ▲1973년 한국예술문학상 수상 ▲1974년 별세<나의 스승 신석정>1954년 1월16일, 신석정 선생과 나는 옹서간이 되었다. 전통과 신식을 겸한 혼례를 거쳐 나는 선생의 맏사위가 된 것이다. 주례는 가람 이병기 선생께서 맡아주셨다.선생을 처음 뵈온 것은 6.25사변의 난중이었다. 대학재학중인 1952년의 가을이었던가. 전주시내 중앙동에 자리한 ‘태백신문사’에서 였다. 당시 이 신문사의 고문이셨던 선생께 나는 졸작을 들고 가 보아주실 것을 청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면을 보니, 같은 면에 나의 시와 수필이 실려있었다. 수필은 ‘최승범’이란 실명으로, 시는 ‘고하(古河)’란 필명으로 게재됐다. 이후 나는 고하(古河)를 아호로 쓰고 있다. 선생이 전북대에 출강하실 때는 ‘시론’을 청강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말하자면 선생은 나의 스승이요, 빙부이시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시제자 노릇도 사위 노릇도 변변하게 하지 못했다. 추회막급이다.선생은 애증이 분명하셨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세상인 걸 ‘미움’까지 챙길 것 있겠느냐는 생각이셨다. 그러나 사회현실에 대해서는 언제나 ‘타협’보다는 ‘파라척결(爬羅剔抉)’로 새로운 역사창조에 기여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었다.가족애는 지극하셨지만 생활·생계에는 거의 손방이셨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의 시구로도 삶의 일면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선생이 나에게 주신 휘필 가운데 하나가 지금도 내 머리맡에 있는 ‘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流水)’다. “올해엔 아버님 전집을… …” 옆에 있던 아내가 말끝을 흐린다. 여지껏 뭉그적거리고만 있었으니 아내 볼 면목이 없다./최승범 (시인·전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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