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원하는 세상은커녕 순리대로 살 수 없는 때가 있다. 이른바 난세(亂世)이다. 이때는 자신에게 세상을 맞추려고 해도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너무나 어긋나 있기에 양심을 가지고는 살 수가 없게 된다. 이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기꺼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값진 희생, ‘영웅(英雄)’이라는 호칭은 그 숭고한 가치를 드러내는 명예로운 이름이다. 그래서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을 것이다.

굴곡의 역사는 그만큼 많은 영웅들을 불렀다. 국가를 위해, 또는 민족을 위해,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된 영웅들 때문에 지금의 우리 삶이 유지되는 것이다. 자꾸 세상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싶은 것은 적어도 그 상황이 위태롭지 않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위태로운 시국이라면 그런 꿈을 꾸기가 어렵다. 어쩌면 양심으로 나서야 하는 결단을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이암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앞서 이야기한 나라를 점지한 계시이다. 이 영험함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또 하나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려는 결기이다. 난세에 영웅들은 성수산과 상이암에 들어가 기도를 하거나 거사를 도모했다. 이 깊은 암자에 의병을 모우고 도모하며 나라를 구하려 한 것이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폐망했다. 당시 지리산 밑에서 살던 매천 황현은 ‘나라가 망했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 나는 비록 국가의 녹을 먹지는 않았으나 하늘을 보고 살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죽자 전국에서 조문객들이 몰려들었는데 그 지리산 아래 외진 마을에 십만 명이 몰렸다고 한다. 그가 사는 집 안에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적은 글이 <오하기문(梧下紀聞)>이다.

<오하기문>에 김개남이 7월 하순 ‘정예 기마병 백여 명을 데리고 임실 산중으로 들어가 상여암(上輿菴)에서 더위를 피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가 알다시피 고부민란에서 비롯된 동학농민혁명은 7월 초순 전봉준과 전라감사 김학진이 화약을 맺음으로써 일단락됐다. 집강소를 설치하여 치안 질서를 바로잡고 관민 합동으로 대소사를 다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김개남은 생각이 달랐다. 썩어빠진 왕조가 이 정도로 바뀌지 않을 거라고 여긴 것이다.

처음부터 김개남은 화약을 거부하고 한양으로 치고 올라가고자 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부하들을 이끌고 상여암으로 들어온 것이다. 상이암을 매천이 상여암으로 전해들은 것이다. 그런데 정말 피서를 하러 그곳에 간 것일까? 김개남의 이름은 ‘기범’이었다. 기범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개남으로 쓴 것도 상이암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세상을 통째로 바꾸고자 했고, 그래서 남녘을 연다는 의미의 ‘개남’으로 개명한다.

그뿐이 아니라 김개남은 임실현감 민충식과 의형제를 맺고, 동학에 입도시켰다. 그리고 구례현감 조규하도 찾아와 입도를 하고, 사촌동생을 김개남의 휘하에 맡겼다고 한다. 이렇게 한 달여를 상이암에 머물다가 남원으로 들어가 몇만 명이 모인 대규모 농민대회를 열었다. 동학농민군 중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김개남 부대는 상이암을 통해 완성된 것이다.

농민군들의 거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조정에서 농민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자 이를 빌미로 들어온 일본 정규군에 결국 좌절한 것이다. 척양척왜를 외쳤던 농민군이 무너지자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가 됐다.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까지 내려져 강제로 머리까지 깎이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전국의 유생들이 들고 일어섰는데, 성수산 자락 삼봉리에서 태어난 이석용도 그 상황을 지켜 볼 수만은 없었다. 세상을 구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이석용 역시 비장한 마음으로 상이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전략을 세웠다. 그리고 무기를 조달할 방법을 모색하고, 사방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불러 모았다. 다음과 같이 ‘격중가’를 지어 의병들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가을바람 소슬하니, 영웅이 득의하는 때로다. 장사가 없을 소냐? 구름같이 모여든다. 어화. 우리 장사들아 격중가를 불러보세. 한양 성중 바라보니, 원수놈이 왜놈이요. 원수놈이 간신이라.”

그는 처음에 무기가 없어 적군의 병기를 획득하기 위한 작은 전투를 벌이다 1907년 9월 진안 마이산(馬耳山)에서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라는 의병대를 일으키고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호남창의소는 전북과 전남 일대를 무대로 일본군은 물론 친일파 등을 처단하며 민심을 얻었다. 그러나 군자금을 약속한 친구의 밀고로 6년간의 의병 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방화상해(放火傷害)ㆍ모살(謀殺)ㆍ강도 및 강도상인(强盜及强盜傷人) 죄목으로 재판을 받았고, 1914년 4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다음은 그가 남긴 절명시이다.

천고의 강상을 짊어짐은 중요하고

? 삼한의 해와 달은 밝게 비치는데

외로운 신하 만 번 죽어도 마음 변치 않으니

사람으로 머리 숙여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네.



이석영 의병장이 운명을 달리한지 100년이 지난 2014년 여름 상이암은 활기가 넘쳐보였다. 찾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일까? 경내에 사람들이 모이면 주지인 동효 스님은 야단법석(野壇法席)을 벌이곤 하신다. 그의 강론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바탕으로 한 삶의 본질 찾기다. ‘나’와 ‘나의 것’ 변하는 것과 무상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명쾌하게 풀어놓는다. 찾는 사람들이 속세의 번뇌와 염원을 안고 들어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를 잘 아는 강명자 문화유산해설사는 주방 보살님도 없이 주지 스님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하신다고 한다. 출타하실 때도 문을 잠그지 않는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점심시간이면 방문객 모두 공양할 수 있도록 밥과 반찬을 밖으로 내놓는다. 그의 도력은 정평이 나 있으나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격이 없이 다가가 대화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