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가 꽉 막혔다. 2012년 8월 10일 대통령의 독도 방문 이후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재확인 했다. 당시 일본 정부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시위성 방문이었다. 일본 정부는 외교청서를 통해 “한·일간에는 독도를 둘러싼 영유권 문제가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하게 일본 고유 영토다. 독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일관된다”며 한국을 자극했다. 대부분 한국 국민들은 독도 방문을 환호했다. 하지만 한·일 관계는 꽁꽁 얼어 붙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집권하면서 한층 악화됐다. 지난 3월 오바마 대통령 중재한 한·미·일 정상회담은 최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님으루(대통령님을) 만나서 반갑스무니다(반갑습니다).”

아베 총리가 서툰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박 대통령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세 정상이 악수해 달라는 카메라맨의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다. 얼어붙은 한·일 관계는 최근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15일 8·15 경축사에 대해 일본 언론은 “대일 비난 강도가 수그러들었다. 문제 해결을 향한 아베 정권의 대응을 촉구한 셈이다”고 해석했다. 외교 전문가들도 “박 대통령이 한·일 관계를 개선할 의지를 확실히 보였다”고 분석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감정이 사납다. 하지만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임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외교 전문가들은 명분에만 집착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광복 69주년을 즈음해 일본 큐슈(九州) 일대를 돌아봤다.

큐슈는 일본 우익 정권의 정신적 뿌리이자 정한론의 이론적 배경을 완성한 곳이다. 또 일본 근대화를 연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곳이다. 한·일 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시기에 큐슈 방문은 편치 않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국가와 국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됐다. 일본을 흔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가깝다. 부산 김해에서 큐슈 후쿠오카 공항까지는 40분이면 도착한다. 군산~제주도 거리와 같다. 개인적으로 후쿠오카(福岡)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꼭 30년 전인 1984년 태어나 첫 해외여행을 했다. 그곳이 후쿠오카였다. 당시 문교부에서 주관한 한일청소년문화교류단에 소속된 단기 해외연수였다. 해외여행 자율화(1988년) 이전이니 쉽지 않은 경험이다.

한 달여 체류기간 동안 한국학생 20명, 일본학생 20명과 함께 했다. 공식 일정이 끝나면 홈스테이 가정으로 흩어졌다. 서툰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홈스테이 가족들과 저녁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도 함께 했다. 내가 묵은 집은 딸만 셋을 둔 집이다. 동갑내기인 대학교 1학년 미끼(美樹), 여고생 하루미(靑美), 여중생 미호(美保)는 온정을 쏟았다. 아버지 후루야 도시끼(古屋 俊毅·78)는 직장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30년 전에 딸만 있는 가정에서 남학생을, 그것도 한국인을 받아들였으니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내가 불편해 하지 않을까 세심하게 배려했다. 주말이면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기 위해 온 식구가 부산을 떨었다. 그들의 진심에 감동한 나머지 일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다. 한국인의 유전자에는 반일 감정이 녹아 있다.

교육을 통해 일본은 용서해서는 안 되는 나라로 배워왔다. 지금도 국가 대항 스포츠경기가 열리면 한국과 일본은 뜨겁게 맞붙는다. 그런데 마음이 열렸다. 귀국후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다 끊겼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도 이들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30년 만의 방문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노부부를 대하는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쳤다. 무엇보다 4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30년만에 왔다는 미안함이 앞섰다. 30년 만의 재회는 모두에게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적으로는 일본은 성장세가 둔화된 반면 한국은 일본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했다. 또 한류에 힘입어 일본인들에게 한국 문화는 동경의 대상이 됐다. 40대 중·후반이었던 도시키(俊毅)와 에츠코(悅子) 부부도 70대 중·후반이 됐다.

세 딸들도 출가해 가정을 꾸렸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많은 일들이 지났다. 노부부는 요란스럽지 않은 가운데 30년 만의 재회를 진심으로 기뻐했다. 호텔로 향하는 내내 30년 동안 묻어둔 속정을 아낌 없이 드러냈다.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알수 있었다. 후쿠오카는 일본 남단에 위치한 큐슈에서 가장 큰 도시다. 인구 150만명으로 전라북도와 비슷하다. 이곳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싸츠마번(薩摩藩·가고시마현)과 죠슈번(長州·야마구치현) 사이에서 격동의 시대를 지켜봤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집중된 에도(동경)에 비해 변방에 불과하지만 오늘날 일본을 만든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다음 날 여든살 가까운 노부부는 직접 운전을 하며 곳곳을 안내했다. 후루야씨와 아버지는 1938년 동갑내기다.

먼저 후쿠오카 근교에 있는 다이자후(太宰府)와 큐슈국립박물관, 관음사를 방문했다. 다자이후는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다. 공부에 대한 열망은 아시아권 어디나 마찬가지다. 각종 시험을 앞두고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 합격을 기원한다.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는 부모의 마음은 같기에 입시철이면 학부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이날도 합격을 기원하는 이들로 발길이 잦았다. 다자이후와 연결된 큐슈국립박물관은 부럽다. 2005년 개관한 박물관은 입구 초입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 어느덧 웅장한 건물이 나타난다. 전면을 유리로 마감한 박물관은 대나무숲에 둘러싸여 풍광 또한 일품이다. 이런 곳에 박물관을 설계한 안목이 돋보인다. 후쿠오카에서 가장 부러운 건물을 꼽자면 단연 박물관이다.

다도 체험도 독특하다. 차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다도를 문화로 승화시켰다. 우리보다 엄격한 격식을 갖고 있다. 다도는 차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다. 단순히 찻물을 목으로 넘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을 수양한다. 차를 내온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에서 시작돼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끊임 없이 배려한다. 사무라이와 함께 다도는 일본 정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후루야씨 집에서는 30년 전 묵었던 방에 들어섰다. 30년이란 시간을 지나 같은 공간에 있다는 느낌은 묘하다. 노부부는 30년 전 내가 선물했던 나무 원앙새를 간직하고 있었다. 원앙을 보면서 이따금 한국에서 온 청년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동안 연락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에 말없이 어깨를 다독였다.

일본인은 누구를 대하더라도 정성을 다한다. 또한 몸에 밴 친절은 감동을 준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국민성은 독특한 국민성으로 이어졌다. 문화학자들은 이러한 국민성을 섬나라와 사무라이 문화에서 찾는다. 대륙 또는 반도국가와 달리 섬나라는 패하면 물러설 곳이 없다. 사무라이가 1,000년가까이 지배하던 시절, 목숨을 보전하려면 굴복하거나 할복하는 길 밖에 없었다. 결국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문화가 오늘날 일본의 친절을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심(혼네)은 다르다며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국민성은 본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처럼 일본은 최근 부흥하고 있다. 일본의 성장에 힘입어 한국도 한때 성장 발판을 마련했다.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은원 관계가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