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눈썹자리에 앉아 세상을 굽어 살피다
산의 눈썹자리에 앉아 세상을 굽어 살피다
  • 김판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 승인 2015.01.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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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 적상산 안국사(하)
▲ 겨울 적상산로 가는길



안국사를 가려면 구절양장 산길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눈이 내리면 오르기가 어렵다. 굽은 길을 오르다보면 산중에 큰 호수 하나가 나타난다. 해발 800m에 위치한 적성호이다. 적상산의 높이로 보면 딱 팔부 능선에 위치해 있다. 가파른 산들이 발 뿌리를 내리는 아늑한 분지에 높이 60m 길이 287m의 댐을 세우고 물을 가두었다. 이 호수는 여느 것처럼 상수원이거나 농업용이 아니다.

1992년 8월부터 2년 2개월에 거친 이 대역사로 완공시킨 양수발전 시설이다. 청평과 삼랑진과 함께 우리나라 세 곳뿐이라고 한다. 적상호를 상부댐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발전을 하고 내려간 물을 모우는 하부댐도 있을 것 이다. 그곳이 바로 무주호이다. 곳낮에 상부에서 348톤의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 7시간 동안 발전을 하고, 전기 사용양이 적은 밤에는 그 하부의 물을 양수기로 끌어올려 상부로 올린다. 밤과 낮이 밝음과 어둠이 아니라 이 물들은 낮음과 높음의 위치 변동인 것이다.

호수 사진을 찍으려 하자 경비원이 급히 제지한다. 국가 중요시설이니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반대편 전망대로 올랐다. 전망대는 조압수조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니까 상부저수지에서 하부저수지로 이어지는 수로 상단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치는 발전기가 급하게 정지할 때 엄청난 압력을 완화시키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호수는 고요하다. 그 고요한 수면에 비해 아래에는 각 골짜기에서 흘러온 물들이 격류로 섞이며 뒤척일 것이다. 바라보는 호수와 저 호수가 안고 있는 것들은 다르다. 그냥 고요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호수는 계속해서 꿈틀거리며 수많은 생명을 잉태하지 않던가? 또 호수는 수많은 인간의 무늬를 간직하고 있다. 물이 빠져 바닥이 드러난 호수를 보면 그 안에 집터도 보이고, 길도 보인다. 농사짓던 논과 밭도 어련하다. 사람들이 소곤거리며 살았을 그 풍경을 호수는 몰래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적상호에 상념이 젖은 이유는 따로 있다. 원래 안국사와 적상산 사고가 모두 호수 안에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아마 저 댐이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댐이 들어서기로 정해지자 안국사 주지이신 원행 스님은 사찰을 옮겨갈 땅을 물색했다. 평지로 내려가면 모든 게 쉬었다. 그러나 호국사찰이자 무학대사가 점지한 ‘국중제일사찰’이란 서원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지금의 안국사 자리이다. 적성산성 안에 호국사 터로 절을 옮겨온 것이다. 1989년의 일이다.

물에 잠긴 안국사를 그리며 일주문을 지난다. 왼쪽 길을 잡아 차를 세우니 산하가 시언하게 발아래 펼쳐진다. 산이 산을 이은 봉우리들이 아침 안개에 아련하게 다가온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아래에 옛날 호국사가 있었음을 알리는 비석이 서있다. 호국사는 조선 인조 때 전라감사 윤은명(尹鳴殷)이 창건비용을 부담하여 지은 절이라고 하는데, 안타깝게 1949년 여순사건 때 불에 타버렸다.

▲ 안국사에서 기도하는 대중들



호국사는 천혜의 요새인 적상산성 안에 있다. 이 산성에서 고려말 최영 장군이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험준하여 적군이 쳐들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를 보관할 최적의 장소로 꼽혔다. 그러나 사람이 머물기는 어려웠다. 인조 때 사고를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보존하기 어렵게 되자, 호국사를 짓고 승군을 모집해 훈련을 시켰던 것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단풍든 장군봉은 마치 잘 썰어놓은 수박 조각처럼 붉은 자태로 빛난다.

청하루를 지난다. 계단이 가파르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사람이라도 이런 곳까지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고 올 수 없을 것 같은데 누마루를 두고 그 아래로 지나가도록 했다. 이곳을 지나면 말 그대로 절대의 공간이다. 극락인 것이다. 극락전이 적상산을 배경으로 당당하게 앉아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한다. 서방정토에 계시는데 헤아릴 수 없는 수(壽), 즉 수명을 지니셨다.

극락전을 지을 때의 일이다. 오늘부터 단청이 시작되니 아무도 안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는 주지스님의 엄명이 있었다. 그런데 항상 일은 사미승이 저지른다. 단청이 끝나기 하루 전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만 엿보고 만 것이다. 그러자 붓을 물고 날아다니며 단청을 하던 학이 그만 달아나버렸다. 그래서 하루 분량의 단청이 그대로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내소사 대웅전에도 전해온다. 육바라밀 중 인욕(忍辱) 바라밀을 실행하지 못한 것이다. 참는 다는 것이 이렇듯 고통이어서 수행을 해야 이겨낼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극락전에 아주 가치가 높은 후불탱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도난당해 볼 수가 없다.

극락전 왼쪽은 천불전이 자리 잡고 있다. 천불전은 조선왕실의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각 건물을 옮겨 놓은 도량이다. 적상산 사고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것으로 창고에서 천 분의 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격상이 된 것이다. 천불전 아래 성보박물관도 있다. 보통의 성보박물관은 해당 사찰의 유물만을 보관하고 전시하나 이곳은 다르다. 세계 각국의 불상이나 탱화 등 500여 점의 불교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어 흥미롭게 둘러 볼 수 있다.

▲ 안국사를 안고있는 적성산성


오른쪽은 지장전과 범종각이 우뚝하다. 특히 범종각 지붕 아래로 펼쳐지는 산자락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다. 아무리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산뿐이 첩첩산중, 그래도 보물 제1267호인 안국사영산회상괘불탱이 괘불대에 걸리는 날엔 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 괘불탱은 폭 7.5m, 길이 10.75m로 대형이다. 조선시대 탱화 화가로 유명하신 천신 스님과 의견 스님이 그리신 것으로 가운데에 주불인 석가모니를, 그리고 그 옆에 네 분의 보살과 여섯 분의 협시보살을 모신 석가칠존도의 형식이다. 보통 때는 극락전에 보관돼 있다가 한해에 한 번씩 밖에 내걸려 야단법석을 벌이는 것이다.

무엇이 이 대중들을 이 깊은 산중으로 부른 것일까? 모두 발복(發福)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복일까? 어쩌면 그 복이 가까이 있음에도 너무 멀리 보며 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다시 산을 내려간다. 광활한 전망과 상쾌한 바람이 아무리 좋아도 우리는 다시 내려온다. 자동차 매연과 북적이는 사람 사이에 우리는 살고 있고, 또 그것이 편해서일 것이다. 일상은 이렇게 밋밋하지만 또 삶을 끌어가는 동력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한다. 바람이 차다. 무주의 겨울은 참 춥다.

/김판용(시인.금구초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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