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 떠돌다 지친 영혼들 돌아와 쉬어가는 곳
영원 떠돌다 지친 영혼들 돌아와 쉬어가는 곳
  • 김판용 시인.금구초중 교장
  • 승인 2015.01.15 19: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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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엔-이야기가 있는 전북의 사찰]모악산 귀신사(상)
▲ 귀신사 전경



힘들고 어려울 때 찾을 곳이 있다는 것은 든든한 배경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그곳에 가서 굳이 누구를 만나지 않더라도 자연적으로 마음의 상처가 누그러지는 곳, 그러 곳이야말로 진정한 위안처가 아닐까? 더구나 그곳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면 세파의 아픔쯤은 호수에 지는 물결처럼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금방 또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들이 아물면서 몸이 더 단단해지는 것이 아니던가?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있는 귀신사를 찾을 때마다 나는 위무를 받곤 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마 적요(寂寥)가 주는 평화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선배 하나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꼭 귀신사에 안장해달라고 자식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전국을 주유했던 그는 꿈에서도 찾고 싶은 몇 곳을 꼽다가 가장 가까운 한 곳, 바로 이 귀신사를 자신의 영면 공간으로 선택한 것이다.

‘귀신사(歸神寺)의 텅 빈 적요 속에서 두어 시간쯤 앉아 있고 싶었다. 무작정 떠남에 있어 가장 많은 유혹을 던졌던 곳도 귀신사였다. 거기에는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양귀자의 소설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아마 소설 속에 화자들이 주변에 많을 것이다. 귀산사의 적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 둘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귀신사를 좋아한다. 처음 갔을 때는 대적광전 외에는 별반 건물이 없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을까? 아주 반가운 소설이 발표됐다. 양귀자의 <숨은꽃>이란 소설이었다. 이 작품으로 작가는 1992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했고, 중견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작품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의 화자는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고 귀산사를 표현했다. 이 말을 좀 범인(凡人)의 이야기로 풀어보면 지친 영혼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쉬는 곳이 아닐까?

그런데 이 소설이 나오고 얼마 안돼서 절 이름이 갑자기 국신사(國信寺)로 바뀐다. 왜 바꿨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국신사라는 명패에서 위압감이 느껴졌다고 하면 과장일까? 당시까지 국가는 통재와 억압으로 무시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름이 바뀌자 그 절에 가기가 싫어졌던 기억이 있다. 다행히 다시 귀신사로 돌아왔다. 국신사로 이름을 바꾼 데에는 물론 이유는 있다. 최치원이 쓴 당나라 소승 법장(法藏)의 일대기인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의상이 세운 화엄 십찰의 하나로 전주 무산의 국사신(귀신사의 옛 이름)가 등장한다. 아마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국신사는 호국사찰, 곧 어용(御用) 사찰처럼 느껴져 거부감으로 다가온 것이다.

자연스럽게 귀신사의 창건으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676년 신라의 고승인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됐다고 알려져 있다.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십찰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화엄십찰에 귀신사는 안 보인다. 그러니까 이걸 그대로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 조선시대 자수 무경(子秀無竟) 스님은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주장한다. 원당 사찰은 왕실의 안녕과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자복사찰이다. 창건의 여부를 떠나 또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왜 국신사가 귀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냐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탑전으로 올라야 한다. 그곳에는 요상한 석수(石獸) 하나가 있다. 개의 형상의 동물 등 위에 커다란 남근석 세워진 것이다. 도대체 이건 뭐하자는 것인가? 풍수지리학자들은 이 터가 구순혈형(狗脣穴形)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개의 음부에 해당한다는 것인데 이런 땅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서 남근의 석수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순사(口脣寺) 또는 구순사(狗脣寺)로 불리다가 귀신사로 바꿨다고 본 것이다.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금산사의 말사로 사세가 크지 않지만 고려 숙종 때 원명국사 징엄(澄儼)이 크게 중창해 금산사보다 더 융성했다고 한다. 휘하에 10여개의 암자를 두었더니 세세가 짐작이 간다. 실제 절에서 한참 떨어진 논 가운데 부도가 있는데 거기까지 귀신사 경내였을 것으로 보인다. 엄징(1090∼1141)은 고려 숙종 임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후 대찰의 주지는 물론 인종의 명에 의해 다섯 교단을 총괄하는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에 들어왔다. 절을 중창한 후 개경의 흥황사로 돌아가 입적했는데, 인종은 그를 국사(國師)에 책봉하고 시호를 원명(圓明)이라 했다 한다.

그렇게 웅장했던 귀신사의 사세가 기울어 폐사 지경에 이르게 된다.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말인 1376년(우왕 2년) ‘왜구 300여명이 전주지역에 쳐들어와 성을 함락시키고는 절에 주둔했는데, 병마사 유실(柳實)이 그들을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그때부터 기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큰 계가는 임진왜란일 것이다. 관군이 제 그 기능을 못하자 승려들이 일어났다. 서산대사는 전국의 승려들에게 총권기하라는 격문을 발표했는데 금산사에만 1,000명의 승군이 집결했다고 한다.

▲ 귀신사의 남근석


금산사에 집결한 승군들은 뇌묵 처영(雷默處英) 스님의 지휘 아래 금산의 배고개전투, 수원의 독성산성전투, 행주산성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으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자 나라에서는 처영에게 절충장군(折衝將軍)이라 직함을 내린다. 당시 귀신사는 승군들의 주둔지(또는 훈련장)이었다고 한다. 승군에 폐한 왜군은 병자호란 때 다시 들어와 금산사는 물론 귀신사까지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귀신사가 기운 결정적인 이유이다.

귀산사의 흘러온 이야기를 벗삼아 경내를 돌았다. 문득 지난 가을 풍경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탑전에 있는 팽나무와 느티나무 아래서 맞은편 백운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운동은 증산의 제자 안내성(安乃成)이 세웠다. 정확히 말하면 안내성의 선도교(仙道敎) 본부가 있어서 신도들이 몰려와 형성된 교인촌이다.

증산도를 세운 강증산이 사망하자 그를 따르던 수많은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우후죽순 수많은 종파들이 생겨났다. 먼저 그의 부인 고판례가 나서 신도들을 모아 선도교를 설립했다. 그녀는 이종사촌인 차경석과 함께 교세를 키웠으나 결국은 차경석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만다. 차경석은 이를 바탕으로 보천교를 세워 엄청난 세를 과시했다. 안내성도 합류했으나 차경석과 뜻이 맞지 않아 1913년 별도로 선도교를 세웠다. 그리고 1927년 백운동으로 본부를 옮겨 전국의 신도들이 불러 모은 것이다.

이상향을 찾아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백운동, 그들은 살기 힘들었기에 솔거해 궁벽한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백운동 마을은 지금 여느 농촌처럼 살기 팍팍해 보인다. 하늘을 보니 구름이 흘러간다. 말 그대로 백운(白雲)이다. 세상은 저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저렇게 떠돌다가 지치면 이리 돌아와 영혼의 안식을 얻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귀신사가 참 따뜻하게 느껴진다.

/김판용(시인.금구초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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