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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따를 것인가 버릴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그림, 인문학을 엿보다 ⑨> 다비드
2017년 10월 12일 (목) 박 제 원(전주 완산고등학교 사회교사) APSUN@sjbnews.com
   
 
  ▲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  
 

선아: 한국의 정치사를 보면 안타까운 일이 많은데 양심수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추석 전 모 신문에서는 추석연휴에도 집에 갈 수 없는 양심수와 농성 노동자들의 슬픔을 기사로 실었더군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는 양심수를 '폭력을 행사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는데도 정치적ㆍ종교적 신념이나 그 밖의 양심에 입각한 신념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또는 인종ㆍ성별, 사회적ㆍ경제적 지위 등의 이유로 세계인권선언과 국제인권규약에 위배되는 투옥ㆍ구금ㆍ육체적 억압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구속으로 인해 신체적 자유가 제한된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국가마다 개념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더군요.

채하: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해 나라ㆍ민족마다의 특수한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사회ㆍ환경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양심수는 실정법상의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없다.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양심수란 반독재, 민주화 투쟁, 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실정법을 어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선아: 그렇다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는 민주정부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더 이상 양심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요?

채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양심수가 실정법상의 용어도 아니며 개념적 해석이 다양한 까닭에 인권단체들은 여전히 상당수의 양심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갑자기 선아가 양심수를 꺼내는 이유가 무엇이니?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하에서는 많은 시민들이 양심수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미어졌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지금은 과거보다는 관심도 줄어들었는데 ...

선아: 양심수들이 양심에 따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신념을 지켰던 것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저도 거의 매일 소소할지라도 양심의 갈등을 느끼고 살거든요.

채하: 그렇지. 양심의 갈등을 겪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양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볼까? 양심은 어원 상 ‘함께 앎’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태도를 정하는 의식이다. 칸트에 의하면 “양심은 인간에게 본성적이며 성장하면서 계발된다.” 더구나 윤리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자신의 태도를 정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그에 따른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선아: 결국 양심적 갈등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이익이든 손해든 그 정도가 크든, 작든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에 사람들은 명백한 진리라고 해도 따를 것인가를 고민하는군요.

채하: 그렇지. 양심에 거리끼지만 복종과 권위에 굴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양심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의 죽음에 대한 그림인데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가 1787년에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다비드는 18세기 말 유럽 전역을 지배했던 로코코 양식에 반발하는 신고전주의 운동을 펼치던 프랑스 화가이다. 아쉬운 것은 그가 뛰어난 예술가였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양심수적으로 살았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정부의 미술집정관이 되어서 혁명적 상황이나 희생자 및 혁명지도자들을 그렸지만 혁명이 좌초하자 나폴레옹의 전속화가가 되어 나폴레옹을 미화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변절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선아: 다비드에게 지나친 비난은 하지 마세요. 역사적으로 양심적인 삶을 포기한 군상들이 너무 많잖아요. 우리지역의 교육운동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어제까지 수십 년 동안 동지였던 교사들이 오늘은 권력에 투항하여 기식(寄食)하는 것을 보면 구토가 나더군요. 아시다시피 교사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굶주리지 않잖아요. 그럼에도 ‘까삐딴 리’처럼 기꺼이 투항해서 서 푼어치 완장을 받더군요. 가령 교육동지였던 내부자들의 교육적 의지가 미흡하고 미래 비전이 희박한데 현직 김승환 교육감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적 믿음을 제시한 것에 동참하기 위해 투항했다면 이해가 되겠는데요. 그런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은 진짜 비양심적이고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웃기기보다 서글픈 일이죠. 더구나 그 교사가 한 때는 교육운동단체의 책임 있는 지위였다면 더욱 그런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는 자신을 판 것이 아니라 조직을 판 것이에요. 가롯유다가 자신을 팔아서 은화를 받았나요? 그의 몸값이 그가 받았던 은화가치만큼 된다고 보시나요? 그가 판 것은 그의 처세와 얄팍함이 아니라 예수와 다른 11명의 제자 및 그를 따르던 동지 및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삶을 판 것이에요. 로마가 그에게 은화를 줬을 때에 그를 보고 은화를 준 것이 아니에요. “보거라! 예수를 따르던 충성스러운 12명의 제자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이 나에게 투항했다.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보거라! 무지몽매한 유대인들이여, 너희들보다 충성심이 더욱 강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예수의 추종자 가롯유다의 행적을.”

채하: 하하하, 선아가 흥분하는군. 선아가 흥분하면 큰일인데... 아마 오늘 술집에 가자고 하겠구나. 물론 술값은 어마무시하게 나올 것이고. 그런데 선아가 귀신인 것 같아. 오늘 샘에게 거액(?)의 돈이 있는 줄 어떻게 알고. ㅋㅋ

선아: 걱정 마세요! 오늘 술을 마시면 제가 술값을 냅니다. 그런데 다비드가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양심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가요?



채하: 그림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침대 위에 똑바로 앉아 그의 제자와 동료들에게 열렬히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제자들은 슬픔에 빠져있지만 영혼의 불멸에 대하여 차분하게 논의하고 있다. 평온하면서도 강직한 얼굴이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절망적이고 슬픔에 겨워 고통스러운 표정이다. 소크라테스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 가운데 크리톤(Crito)과 플라톤(Plato)이 보인다. 플라톤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슬퍼하고 있으며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무릎을 쥐고 있다. 크리톤은 죽음의 문턱에서 소크라테스를 구제하여 타지로 보낼 요량으로 그를 데리러 왔지만, 소크라테스가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하자 그를 열심히 설득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왼손을 들어 참된 진실로 가득 찬 천국을 가리키고 있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각각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그들은 마치 무대와 같은 좁은 공간 속에서 프리즈처럼 배열되어 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의 조각상과 같이 신체표현과 동작이 모두 이상화되어 있다. 인물들의 뒤로 보이는 벽은 직사각형의 벽돌로 쌓여있어 형태가 분명하고도 규칙적이며, 차갑고 선명한 색채로 나타난다. 또한 빛과 어둠의 효과를 잘 배분하여 처리함으로써 동시에 존재하는 인물들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명암처리를 통해 특히 소크라테스의 존엄함을 부각시키고 그의 신성함을 효과적으로 구현한다.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는 어떠한 대상들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다. 이는 램프나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빛 때문이 아니라 인물 그 자체로 후광과 같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선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도망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처음 알았어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도망갔을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왜 거부한 것이죠?

채하: 크리톤이 찾아오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거의 한달 동안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테네 사람들은 아테네의 청년을 타락시켰다고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지만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공익과 선을 떠들지만 자신의 이익에만 골몰하던 그들을 비판하자 성가시고 불편하게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는 끊없이 진리를 권고했던 그를 그냥 두게 되면 그들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지킬 수 없다고 본 것이지.

선아: 그러니까,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만들었군요. 현대적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양심수였다고 할 수 있군요.

채하: 친구인 크리톤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설득한다. 친구이자 제자로서 선생을 돕는 것이 도덕적이며, 시간이 지나면 나중에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니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아이들이 어리니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설득한다.

선아: 제가 볼 적에는 다 맞는 말인데요. 무엇보다도 아버지라면 자식의 삶을 위해서라도 살아야 하잖아요. 그 아이들의 교육받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버지로서의 몫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소크라테스가 양심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양심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했나요?

채하: 그는 크리톤에게 어떤 것이 옳다면 더 이상 닥친 상황이나 행위의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거나 설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설명한다. 크리톤이 처한 난처한 상황이나 소크라테스 자식들의 운명도 고려해야 하지만 오직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의냐 불의냐 하는 것이다.

선아: 그렇다면 그가 처한 상황에서 정의는 무엇이었나요?

채하: 국가와 법에 대한 그의 시각이었다. 그는 국가의 법들은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를 돌보는 것이기에 국가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국가의 법들을 준수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 크리톤도 그것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국가가 공동체의 질서와 정의를 돌보는 것은 맞는데 그 과정에서 집행자들이 불의를 행하고 재판에서 잘못했다고 본 것이지. 그래서 소크라테스에게 그 과정이 나중에 제대로 될 것이니까 우선 탈옥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선아: 근본적으로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시각이 일치했다면 크리톤을 따를 수도 있었잖아요? 소크라테스는 양심적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되었잖아요?

채하: 그렇지 않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학자들을 ‘의무론적 도덕주의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인간의 행동을 오직 그것에 내재한 신조, 의도나 동기에 따라서 평가한다. 즉 어떤 행동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그것의 원칙이 선할 때만이 옳다. 행위의 결과와는 무관하다고 본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경우에도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규칙과 이 규칙을 따르도록 하는 양심이 그의 윤리를 정한다.

선아: 학교에서 배웠던 독일 철학자 칸트하고 비슷하군요.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위한 유일한 전제는 선의지로서 도덕적으로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이기주의적이거나 그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하지 않으며 오직 선의 필연성을 따른다고 했거든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각자가 갖는 선의지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요?

채하: 각자에게 있는 것이지. 그것이 바로 양심이란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의 내면은 양심이 지배하기 때문에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한 판단은 양심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지향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잘 안다고 본 것이다.

선아: 교육과 학생을 위해서라고 수없이 말하고 있지만 선의지를 따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교육감이나 교육관료 및 교사들도 사실은 그 자신이 이기적이거나 충동적으로 권력이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이군요. 그러면 양심이 없는 인간도 있나요? 부도덕한 인간들에게 양심이 없다고 하잖아요.

채하: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갖는다. 몰 양심이나 나쁜 양심은 양심의 부족이 아니라 고의로 내면의 도덕적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지. 쉽게 말하면 그 스스로 양심을 무시한 것이지.

선아: 저는 양심적 갈등이나 양심에 대한 소크라테스나 칸트의 견해를 듣다 보니까 옳지만 오히려 숨이 막히기도 해요. 늘 양심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것 같이 느껴지고요.

채하: 맞다. 그런 생각은 당연하다. 그래서 니체는 소크라테스나 칸트의 이러한 엄격한 양심론을 부정한다. ‘양심은 내면의 목소리가 아니라 억압적 요청이며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억압의 도구’라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은 항상 그가 따르는 권위에 대해 주어진 나쁜 양심으로 부터 죄의식에 시달려야 하고 인간을 조작시키는데 사용된다는 것이지.

선아: 어찌되었든지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억압적으로 느끼지 않으면서 양심을 지키기 위한 대안은 없는 것인가요. 니체의 의견도 타당한 면이 있잖아요. 우리가 양심의 의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국가나 지배자의 통치에 부합하는 수동적 인간을 양성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 것도 사실이고요.

채하: 양심의 발생과 기능에 대해 아주 현실적인 의견을 제시한 학자가 있다. 프로이트인데 양심은 교육을 통해 성립한다고 보았다. 아이는 부모의 규범을 내면화하고 그런 후에 이 규범은 자아를 형성함으로써 충동에 따라 살고자 하는 본능적(이드적) 욕구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즉 양심이 충동을 조절하고 남과 다른 고유한 각자(자아정체성)를 사회에 드러낸다고 본 것이다.

선아: 그렇다면 결국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양심을 형성하기에 중요하며 그것을 내면화시키는 부모나 교육의 역할이 매우 크겠군요. 결국 양심의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은 규범을 갖춘 사회, 그것을 전달하는 지식전수자의 자세 및 의지가 아주 중요하군요. 저는 이런 자세가 누구보다도 먼저 대통령과 교육부장관, 교육감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교사들에게도 있어야 하지만 제도 및 정책의 결정권자인 그들의 의식이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잖아요. 특히 그들이 옳음을 고민하지 않고 양심적 갈등을 권력과 지배의 욕망으로 해결하는 저열한 의식을 갖고 있다면 그토록 칼 마르크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각 테제마다 담고자 했던 ‘인간의 세상(Human society)를 열 수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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