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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의 진료실 일기] 잠이 많아야 부지런하다
2017년 10월 12일 (목) 김재엽 전주 우리병원 원장 APSUN@sjbnews.com
곤히 자고 있는 막내딸을 보고 있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전라도 말로 ‘귄 있다’는 표현이 이때 딱 들어맞는다. 남들이 들으면 또 영락없이 ‘딸 바보’ 라고 놀리겠지만 곤히 잠든 아이의 얼굴은 보는 내내 정말로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불현 듯 내가 잠을 자는 모습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가뜩이나 잠이 많이 늘어 아내에게 핀잔을 듣는데 딸아이처럼 그렇게 예쁜 모습으로 자지는 못할 성 싶다. 결혼 초기만 해도 아내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잠을 적게 자는 사람일 거란 얘기를 들을 정도였는데 요즘은 사정이 많이 달라져 자는 시간이 늘어만 간다. 친구나 선배들은 나이가 들수록 잠이 줄고 어쩌다 새벽에 잠이라도 깬 날은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곤욕을 치른다는데 도리어 나는 점점 더 잠에 사로잡혀 가고 있으니 이상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잠을 자는 이유는 인체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디지털 치매』라는 책을 쓴 만프레드 슈피처 박사는‘수면 중 휴식’ 이론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단언한다. 최근의 의학이론도 사람의 뇌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쪽이 우세하다.
잠을 자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꿈꾸는 시간 20%, 깊게 잠자는 시간 20%,얕게 잠자는 시간 60%의 비율로 수면 시간 동안 이 과정이 네다섯 번 정도 반복된다. 꿈을 꾸는 시간에 우리 뇌는 깨어 있을 때와 똑같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외부세계와는 단절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속에서 누군가에게 쫓겨 달아나더라도 다리가 가만히 있는 이유는 뇌가 낮에 그랬던 것처럼 운동신경에 신호를 내려 보내더라도, 신경차단 물질이 흘러나와 수면 중에는 근육이 반응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잠을 자는 동안에도 뇌는 그 날 새롭게 입력된 정보들을 끄집어내어 기존에 있던 추억, 감정, 정보와 결합시키고 새로 분석해 저장한다. 어찌 보면 잠을 자는 동안 되는 가장 깊고 격렬하게 사고하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많이 학습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잠이 필요하다. 낮에 학습한 내용에 대해 밤에 다시 한 번 요점을 반복 정리해서 기억 속에 고착시켜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이 부족한 사람은 학습능력이 떨어지고, 일상의 무수한 고민과 근심들이 정리되지 않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면증에 시달린다. 또한 수면 부족은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인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리고 잦은 감염질환과 발암으로 이어지며 특히 심혈관계 질환과 비만, 당뇨병의 발병 확률을 크게 높인다.
『삶의 힌트』를 쓴 이츠키 히로유키는 남아시아의 어느 원주민 사회에서 하루를 ‘낮 하나’와 ‘밤 하나’로 부른다는 사실을 소개하면서 밤은 이야기의 세계이고, 상상력의 시간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잠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현대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문명이라는 ‘근대의 잣대’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 등을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 한 분이 늘 ‘부지런하게 살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시기에 “부지런한 게 뭔가요?”하고 여쭈어 본 일이 있다. 선생님의 대답은 ‘부지런하다는 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 분의 말씀은 삶이라는 게 양적인 것보다 질적인 것에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일찍 일어나서 일을 되도록 많이 하라는 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말씀이 퍽 가슴에 와 닿아 그 후부터는 가능한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놓치지 않으려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하루 종일 일에 몰두하고, 밤잠까지 줄여가며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잠을 많이 자더라도 꼭 해야 할 일을 빠트리지 않는 것이 더 부지런한 게 아닐까 싶다. 진료시간이 끝난 후 틈틈이 글을 쓰고, 간간히 책을 읽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정리하고, 내 자신의 미미한 감정의 속삭임에도 귀를 기울이는 나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꽤 부지런하게 사는 셈이다. 요즘은 진료실 안에 디지털 피아노를 들여놓고 틈틈이 배우고 있고, 가끔씩 LP판을 정리하며 클래식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집에 가면 아이들과 30분정도 몸으로 놀아준 뒤 잠들기 전 아내와 또 도란도란 그 날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재미도 포기할 수가 없다.
아이들 육아나 가사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쉬는 날 잠만 잔다고 타박하는 아내에게 이제는 당당히 말하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심화학습하기 위해서라도 내게는 정말 길고 긴 단잠이 필요하다고···.
/전주 우리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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