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성지 남원 은적암 복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돼야"
“동학의 성지 남원 은적암 복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돼야"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8.01.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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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용담검무(龍潭劍舞) 남원지회, 남원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주변 정리

 

‘동학의 성지’ 남원 은적암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조선 조정의 칼날을 피해 남원 교룡산 등지에 은거하며 저술과 포교활동을 벌이는 등 동학성지이지만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난해 연말을 맞아 남원시와 남원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 용담검무(龍潭劍舞) 남원지회가 남원 교룡산성과 은적암 터 주변 정리를 했다는 사실이다.
3백만원의 예산을 들여 남원시 문화관광과 홍성봉계장, 남원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임종명부회장, 용담검무전승자 장효선 명인, 그리고 동학계승사업회 회원들이 모여 나뭇가지와 그리고 덤불들이 마구 쌓인 은적암 터를 처음으로 정리했다는 것.
최제우가 남원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1961년 광한루 밑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던 서형칠이었다. 이때 양형숙, 양국삼, 서공서, 이경구, 양득삼 등이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 이것이 남접의 시작이었다. 그후 서형칠이 최제우를 교룡산성의 ‘조용한 암자’ 덕밀암(은적암)으로 모셨다.

최제우는 이곳 덕밀암에서 6개월을 지내며 암자의 이름을 은적암(隱蹟庵)이라 고쳐 불렀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는 이 기간 동안 “힘써서 〈도수사(道修詞)〉를 짓고 〈동학론(東學論)〉과 〈권학가(勸學歌)〉를 지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최제우는 이곳 은적암에서 〈칼노래〉 즉 ‘검가’를 지었다. 칼 노래는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중에 혁명적인 노래의 핵심이 되었던 바, 최제우는 묘고봉(妙高峰)에 올이 노래를 부르면서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

최제우는 은적암에 은거하며 교룡산과 묘고봉(妙高峰)에 올라 칼노래와 칼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때 불렀던 칼노래 즉 '검가'로 바로 용담검무다.
'칼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대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 있네, 만고망장 어디 있나 장부당전 무장사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용담검무는 최제우가 1862년까지 남원 생활을 하면서 이곳에서 창작한 춤으로 알려져 있다. 장효선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는 고조부 장남진(1817년-1883년, 남원출신), 증조부 장수만(1852년-1931년), 조부 장대성(1877년-1942년)에 이어 부친 장영철(1923년-1980년)으로부터 직접 전수 받아 40여년 동안 지켜오고 있다.
이때 최제우가 목수로 활동한 장남진에게 목검 제작과 용담검무를 가르쳤다고 전해내려오고 있다. 최제우가 이곳서 만든 용담검무(龍潭劍舞가 지난해 11월 156년만에 장효선 명지대 사회교육원 교수에 의해 첫 선을 보였다.
장교수는 “한민족 고유의 검무를 바탕으로 수운 최제우(1824~1864)선생이 창안, 수련에 쓰인 것이 ‘용담검무(龍潭劍舞)다.”면서 “지난해부터 남원에 자리를 잡아 이를 보급하고 있지만 은적암이 복원이 안돼 아쉽다”고 했다.
한편 동학이 남원 지역에 처음 포교된 것은 1861년이다. 최제우가 남원의 서공서 집과 교룡산성 내에 있던 은적암에 머물면서 동학을 포교했다. 이때 포교로 남원에서는 한때 수만의 동학 교인이 있었지만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운봉과 여원치에서 전투를 치른 이래 동학은 남원 지역에서 점점 쇠퇴했다. 현재 남원 지역에는 동학 교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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