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아이들이 많지만 강아지 한 마리 더 있어도 될 듯싶었다. 몇 해 전 친구가 ‘풍산개’ 한 마리를 분양해줘 집에 데려왔다가 함께 쫓겨났었다. 풍산개는 결국은 땅다운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병원 건물 5층에서 살다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장염에 걸려 죽었다. 거금을 주고 성대하게 화장해 주었다. 지인이 강아지를 분양한다고 해서 또 한 번 수작을 부려보았다. "우리 집에 들어온 생명을 내쳐서 횡사하게 만든 비정한 사람”이라는 제법 자극적인 단어 선택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시켜 떼를 쓰게도 해보았지만 아내는 끔쩍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강력한 반대 이유는 ‘개를 키우면 개를 사랑할 수 없다’는 묘한 논리였다. 왜 그럴까.
내가 사는 곳은 다행히 일반 주택이라서 12시 밤늦도록 타잔놀이를 해도 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개짓는 소음’때문에 앞, 뒷집이웃이 조용히 민원을 넣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 동네 개들은 대부분 허스키한 쉰 목소리를 낸다. 덩치 큰 세퍼트가 성대 수술을 해서 ‘흑흑’거리며 짖는다. 비참하고 처량하다 못해 우습다.
아내는 우리 동네에서 개를 키우려면, 성대 수술부터 시작해서, 노린내 제거하는 수술까지 해서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키워야 하는데, 그것은 동물 애호가 아니라 학대라는 것이다. 동물이 좋아서 기른다면서 학대 이외의 방법으로는 기를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그 대목에서 개권(犬)을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짖지 못하도록 성대수술을 해서라도, 또는 노린내가 나지 않도록 땀샘을 막아버리거나 아예 품종을 개량해서 털이 나지 않는 애완용으로 기르는 행위가 문명화와 함께 밀려들어온 서구식 ‘사랑’의 개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양인들은 개에게 매니큐어를 칠하고 옷을 입히듯이 이민족에게 자기 종교와 자기 문화를 강요하는 것이 문명화고 현대화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신앙과 전통을 공포와 경멸의 대상을 보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없애버리거나 단절시켜 버렸다. JJ 클라크는 이렇듯 우리를 문명화하는 것이 신이 부여한 권리라는 신념은 특히 식민지 제국주의자들의 선봉장인 기독교 선교사들의 강력한 추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전통을 없애버린 후에는 ‘전통이 없는’ 문화의 후진성에 대해 비판을 하며 열등감을 심어주고 우월성을 드러낸다. 예들 들자면 ‘보신탕’을 먹는 우리나라의 후진성과 ‘개’를 사랑하는 프랑스의 동물애호와 견주는 식이다. 어떤 분에게 ‘인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일본과 서구 열강의 강압적 개화로 그나마 근대화가 앞당겨지고, 토지개발과 지리연구로 버려졌던 국토가 개발되고, 사장되었던 퇴계 이황의 유학이나 불교의 사상이 복원, 연구된 좋은 측면이 있다’ 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서양이 동양철학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들로부터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거칠고 교활한 방식으로 동양을 자신들의 사고방식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았던 독일인 드네 게농의 이야기나 ‘동양인들을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동양인들이 서구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굴복하게끔 하는, 다시 말해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통합적 지식체계를 창조하는 데 있다’는 사이드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각기 다른 그 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조화, 융합시키는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예부터 부부의 호칭부터도 ‘여보’라고 한다. ‘여보’는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의 준말이라고 한다. 종속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 친구처럼, 연인처럼 각자의 인생을 각자가 잘 살고 있는지 서로 지켜봐주는 관계말이다. 오히려 요즘 자주 쓰는 ‘자기’라는 말이 자기 자신도 ‘자기’라고 하고 상대방도 ‘자기’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 말속에 ‘넌 내꺼야!’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 단어라고 설명하시는 학자분도 계셨다. 말하자면 ‘서양식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사드’배치에 대해 주변 강대국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찬반의 여론이 다양하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지난 20년간 미국이라는 나라가 국지전에 개입하여 ‘명분을 인정받은 사례’도 있지만 태평양 방공권을 위해 수하르토의 군부독재를 후원하고, 15만 명을 학살한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침공을 승인한 것처럼,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자유 수호와 인류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면서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서슴치 않은 경우도 수두룩했다. 어떤 식으로든 현 정권의 ‘통치 권력의 유지’수단이나 열등감이 찌든 ‘서양식 사랑’의 수여자로서가 아닌, ‘국익’뿐 아니라 ‘정의 실현’ 말하자면 나름의 세계와 자연 질서를 잘 유지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과 정치운용기술을 발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주 우리병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