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엄마 찾아요. 또 어딜 가세요!”
막 집을 나서려는 데 앞집 아기 엄마가 말한다. 육아맘인 그녀가 자신의 아기와 연령이 비슷한 내 아기를 워킹맘인 나를 대신하여 수차례 보살펴 주었다. 안타까워서 던지는 말이란 걸 모르지 않는다. 그래도 이 말에 그만 심장이 무너진다. 이번 주에는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공적개발원조) 특강자로 초대되었다. 주말까지 나가야 하는 내 심정을 몰라주는 이웃이 야속하다. 누구는 나가고 싶어서 나가나.
아기의 옷을 입히고 아기의 음식을 만들고 아기의 간식을 챙겨서 함께 나누고 싶다. 아기의 배변 활동을 돕고 아기가 벌여 놓은 가재도구들을 정리하고 함께 오수(午睡)를 누리고 싶다. 둘이서 종알종알 떠들며 집 안팎을 하루 종일 오가고 싶다. 나는 아기 돌보기를 피하는 엄마가 아니다. 오히려 아기 돌보기 노동을 강력히 즐기고 싶다. 앞집 아기 엄마의 핀잔 아닌 핀잔에 억울한 심정이다.
주중에는 직장 일로 혼이 쏙 빠진다. 주말에는 쉬어야 주중을 버틸 수 있을진대 그렇지 못하다. 일의 특성 상 배우고 연구할 시간이 늘 부족하다. 대부분의 직업처럼 선생이라는 일도 시간 싸움이 크다. 주말마다 각종 워크숍과 세미나, 연수, 학술답사 등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더러는 건너뛴다 해도 최소량은 채워야 한다. 연간 써야 할 논문들이 빨리 마무리해 달라며 나를 옥죈다. ‘너는 아기 엄마니까 봐 줄게’라는 예외는 없다. ‘그러니까 여자는 안 돼’라는 일반화가 무서워 나를 더 다그치게 된다.
조직 속에서 일하고 논문을 써서 학술적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노동이 아기 돌보는 노동보다 값지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둘 다 힘들고, 힘든 만큼 보람을 얻는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창조성 측면에서도 그렇다. 우수한 학생들을 양성하고 논문을 통해 학계에 진일보한 논점을 제기하는 창조성만큼 돌봄의 에너지로 매일 아침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작은 인간 존재물의 생성과 발달도 놀랍기만 하다. 아기 돌보기는 생명의 신비 체험이다.
요즘 들어 한국 사회에서 희귀해져서 가치 함축적인 존재가 ‘아기’다. 혹자는 이들에게 멸종위기종이라는 별칭을 달기도 한다. 그러니 더욱 아기 돌보는 일이 소중해졌다. 유아교육 분야가 호황 일변도고 출산 관련 분야가 다양하게 성행 중이다. ‘자연주의 출산’이 유행이다. 귀한 아기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접근하자는 사회적 반증이지 싶다.
이러한 변화는 가파르다. 얼마 전까지 바글거리던 게 아기였다. 그때는 아기를 귀찮아하던 어른들이 있었지만 요즘은 손자를 기다리는 노인들이 더 많다. 책 『격대교육』이 읽힌다. 급격한 변화 속에 국가 정책이 사회 문제를 감당하지 못한다. 올 9월부터 아동수당(71개월까지 월 10만원 지급)까지 시행되지만 여전히 턱 없이 부족하다. 이 아동수당으로 출산이 늘어날지 미지수다. 아기는 최소 36개월 동안 부모 중 한 사람의 지속적인 돌봄이 보장되어야 한다. 출산 휴가는 3개월, 육아 휴직은 1년. 부모가 다 써도 모두 합쳐 27개월이다. 그것도 정규직만 가능하다.
내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지 25개월째다. 서서히 독립을 익히는 중에 부모 모두 직업 전선으로 홀연히 사라졌다. 당연히 불만스럽다. 나만 보면 생떼를 쓴다. 잘 먹던 밥도 숟가락 탁 놓고 ‘먹여 줘’다. 잘 자던 잠도 계속 깨서 소리를 지른다. 이불에 오줌을 싼다. 젖병을 쥐고 다니면서 ‘나는 아직 어리니 돌봐 줘’ 소리 없이 외친다. 아무나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우리 엄마 일하러 갔어요.”
라고 외친다. 앞뒤 맥락도 없이 누구건 간에 똑같이 그런다. 고 귀엽고 짧은 혀로 곁에 없는 엄마를 호명한다. 불러도 대답 없는 엄마다. 언젠가 대가를 치룰 일이다. ‘아기야, 엄마는 네가 미워서 일하러 간 게 아니야. 네 옆에 있고 싶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