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창] ‘사법 개혁’
[전북의 창] ‘사법 개혁’
  • 이 창 필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8.0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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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의 복잡함은 하느님도 피곤하게 한다. 너무나 요구도 많고 헤아릴 일도 많아서 하는 수 없이 하느님께서 판단했다. ‘나를 대신할 사람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탄생한 신을 대신할 인간의 두 모델이 선정되었다. 그 하나는 ‘엄마’이고, 두 번째가 ‘법관’이다.
마른자리 진자리 갈아 뉘이며 끝없는 애정과 사랑으로 자식을 돌본다. ‘엄마’라는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우리들은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그 품이 넓고 크다. 자애로움과 희생의 크기는 가눌 길이 없다. 그렇게 ‘엄마’는 하느님의 시름을 크게 덜어주고 있다.
심판의 날! 죽음이 우리 앞에 닥치면 어쩌면 우리는 인간 세상에서 쌓고 쌓은 그 모든 업을 지고 또 다른 심판대에 설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자제하고, 겸손해하고, 베풀고 돌아본다. 죽음의 그날까지 아무런 단죄 없이 맘껏 살다가 오직 죽음 앞에서만 단죄하기에는 인간의 품성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함께 살면서 조심하고, 다독이고, 서로 돕고 서로 해하지 않도록 많은 약속들을 우리들은 해왔다. 우리가 약속하고 우리가 지키겠노라 만들었던 그 수많은 믿음을 우리들은 돌아서면 깨뜨린다. 마지막 날의 수고와 후회를 예방하고자 했던 우리들의 믿음과 약속마저도 지켜지지 않을 때 ‘법관’이 필요했다.
‘같은 인간끼리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라는 평범한 진리를 뒤로하고 우리는 ‘법관’들의 판결에 순명해왔다. 필요 이상으로 그들을 존경했고, 그들의 판단이 양심에 따른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군사 반란, 권력 남용, 독재 등 현대사의 수많은 굴곡 하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우리사회의 ‘마지막 보루’라는 희망의 끝을 놓지 않았었다. 
처음 ‘사법농단’이란 단어가 언론에 등장할 때에도 설마설마했던 게 사실이다. 세상을 살면서 여러 이해관계가 부딪히고 다툼이 생긴다. 그 갈등과 다툼이 모두 다 법정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용서하기도 하고 서로 조정하고, 양보하고 묵인하고 그렁그렁 살아간다. 그런데 재판이란 게 무엇인가. 도저히 양보할 수 없고, 도저히 용서할 수도 없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해결 하다못해 마지막으로 법원의 심판에 의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큰 사건, 작은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재판 하나하나마다 피눈물 나는 사연들이 개개인과 이 사회의 얽힘이 매듭지어 있다. 진정으로 사감 없이 사회적 통념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단함이 온당할진대 기획하고, 사찰하고, 거래하고, 팔아먹는 대한민국 사법부의 민낯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하느님이 실수하신 걸까? 이들의 잘못은 누가 심판해야 하나. 구호만 요란했던 적폐청산의 길은 정말 멀고도 험난하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요소요소에 남아있는 진정한 판사들을 찾아내야 한다. 그들의 참신함으로 사법 개혁의 씨앗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잖은가. 신의 선택인 ‘엄마’와 ‘법관’은 절대로 오류일 리가 없다. 진정으로 기대해 본다. 어쩌면 사법 개혁이 우리 사회의 마지막 적폐청산이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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