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축구=이병학’
고창에선 1919년 고창고등보통학교(고창고보)의 설립 이전에는 새끼줄을 똘똘 말거나, 돼지 오줌통에 공기를 넣어 만든 공으로 마을 주변 공터나 어귀에서 주민들이 편을 갈라 축구 경기를 하곤 했다. 고창 축구가 호남 일대에서 강자의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1925년에서 1934년까지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체육 교사로 봉직했고 조선체육증진법연구소를 창설한 현 일본체육대학 출신 이병학(李炳學, 1898-1963)의 지도 덕분이었다.
이병학은 축구 이외에도 육상, 야구, 농구, 정구, 유도, 검도 등 다양한 스포츠를 권장했고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앙양하고 항일 투쟁의 강인한 정신을 길러 당시 고창고등보통학교가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 명문 학교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에 기여했다. 고창고보 축구팀은 1926년 서울의 배재고등보통학교, 평양의 숭실고등보통학교 등의 명문 팀이 참가한 중앙대회에 도전하여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출전 선수는 신영택, 고재천, 박동차, 원성용, 서형남, 조순조, 신봉섭, 박동수, 유훈석, 이인권, 백남영 등이었으며 처음 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맹활약을 보여 축구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당시에도 지방의 체육 재정 형편이 어려워 중앙대회 출전에 애로가 많았지만, 매년 조선체육회에서 주최하는 축구대회에는 호남의 패자(覇者)로서 항상 출전했다.
이병학은 서울에서 출생, 일본체육전문학교 출신으로 재학 시절 평양축구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원정하는 등 솜씨를 보여 주었고, 고창고보에 1925년 4월 1일 부임, 1935년 보성전문학교로 옮기기 전까지 축구, 육상, 정말 체조(덴마크 국민 보건 체조)를 보급한 사람이다. 고창중교등학교 60년사(1982년 발간) 411-418 페이지에 15조가 소개됐으며, 실행에 대한 주의를 뒤에 소개했으며, 교지 고창 8호에 실렸다)
그는 고창고보 재직시 밴드부를 만들었으며, 학생들을 홍성루 중화요릿집으로 데리고 가서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그후 서울 돈암동에서 정인승, 김재현선생과 함께 목장을 만들어 산양을 키웠으며, 벌도 쳤다. ‘펄펄 날고 뛰는 고창 선수들 용감하고도 활발케 곳곳마다 적군을 깨뜨려 우승 깃발 휘날리세’ 등 응원가 2가지와 '‘Hoopla 고! Hoopla 창! Hoopla Hoopla 고창 Rha Rha Rha! Sisboomba! 고창고보 Rha Who Rha!'로 명명된 ’교엘‘ 2가지를 불렀던 고창고보 성산(聖山)의 건아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는 고려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건국 후 최초의 올림픽이었던 런던 올림픽 대회 때 한국 대표 선수 단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어 대한체육회 부회장과 서울대 사범대학 체육학과 교수로 일했다. 지난 2003년 제84회 전국 체육대회를 개최한 이후 15년만에 제99회 전국체육대회와 제38회 전국장애인체전이 오는 10월 전북에서 개최된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해줄까 자못 궁금해진다./이종근(문화교육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