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필암서원 길굿, 정읍농악이 해왔다
장성 필암서원 길굿, 정읍농악이 해왔다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8.10.16 1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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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악공이 없어 정읍농악대의 전재성이 와서 악공의 일 맡아
6.25호 직후 정읍농악단의 농악경연대회
6.25호 직후 정읍농악단의 농악경연대회

 

아주 오래전부터 전남 필암서원의 길굿을 책임진 농악이 정읍농악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최근 들어 펴낸 ‘필암서원(김봉곤, 박미향, 안정애, 김상집, 노금선)’이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주고 있다.<편집자>

필암서원의 춘추 향사는 문필천에서 확연루까지 길굿으로 시작됐다. 필암서원만의 이 길굿은 춘추 향사 때마다 의례적으로 행해 왔다.
이곳의 길굿은 곧 김인후의 가르침을 문필천에서 필암서원까지 연결하는 의례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길굿은 길에서 움직이는 모든 형태의 음악을 상징한다. 동시에 마을의 잔치를 알리는 길거리 행사로 서원의 향사를 인근 동네에 떠들썩하게 알려 함께 참여하도록 독려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다니는 모든 길위에서 행해진 이 길굿은 행진곡풍의 박진감이 넘치는 가락으로 구성됐다. 저자들은 창건된 이래 필암서원의 악공들이 길굿을 맡아 왔다고 보고 있다. 어떠한 일인지는 몰라도 1921년 악공이 없어 정읍에서 보천교 차천자의 취타대를 잘 아는 정읍농악대의 전재성이 와서 악공의 일을 맡았다.
1936년 차천자가 죽고 그의 취타대는 정읍농악대로 바뀌었는데 전재성은 이의 중심 인물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한편 1945년 11월 23일 김구 주석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해 김시중과 보천교 일행에게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빛을 졌다’고 했다. 김시중과 필암서원 관계자들은 일찍이 보천교와 당시 취타대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후임 악공을 정읍농악대에 요청했지 않았나 생각된다.
전재성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기 위해 서울 창경원에서 열린 제1회 전국농악경연대회와 이어 2회 대회에서 연달아 정읍농악이 대상을 받았을 때 그가 정읍농악대의 대포수였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대포수는 상쇠와 함께 판을 이끌어 나가는 잡색의 리더격 인물로 모든 기명을 알아야 하고, 판굿의 끝판에 상쇠와 함께 도둑잽이 놀이를 이끄는데 특히 만담을 잘 해야 한다.
1970년대 초까지 필암서원의 춘향제와 추향제, 백중에는 정읍농악대가 와서 문필천에서 확연루 앞까지 길굿을 했다. 
전국의 모든 농악은 자진모리로 대부분 거의 비슷하며 이는 군산훈련 박자이다. 그러나 정읍농악은 반드시 그 태평소 소리가 백제가요 ‘수제천(정읍사)’의 소리에 맞춰 연주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길굿은 확연루 앞에서 절정에 달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무리를 하게 되는 바, 이때마다 전재성은 열두 발 상모를 돌려 관람자로부터 찬탄을 받았다. 
전재성은 쇠를 치며 이건 당시 심어놓은 확연루 앞 은행나무를 열두 발 상모를 돌리며 한 바퀴 돌고, 또 쇠를 치다가 또 돌고 하며 흥을 돋구웠다고 한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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