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선비 황윤석, 남양주 석실서원을 찾은 이유는
고창 선비 황윤석, 남양주 석실서원을 찾은 이유는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8.10.1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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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석의 이재난고 통해 터만 남은 석실서원 가는 일정 눈길

 

남양주 석실서원은 19세기 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면서 현재 터만 남아 있다. 18세기 중엽 이재 황윤석(고창출산)은 일기를 통해 “서원 문밖 원향정(遠香亭)에서 쉬고 있다가 달이 뜰 무렵에 동강당(東講堂)에 들어가 유숙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조선 영조대 최고의 천문학자로 이름을 날린 이재 황윤석(黃胤錫, 1729~1791)가 바로 이곳을 찾은 것은 왜 일까.<편집자>

최근에 발간된 ‘석실서원(조준호, 이근호, 박병련, 김자운, 박용만, 박진재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은 황윤석이 ‘이재난고’를 통해 석실서원에서 서울에 이르는 노정과 석실서원에서 춘천에 이르는 노정이 지리적 여건과 함께 자세히 실려 있다.
고창 출신 황윤석은 시골에서 생활한 탓에 마땅한 스승을 구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28세가 된 황윤석은 부친의 강압에 못이겨 미호 김원행을 찾아갔다고 한다. 김원행은 당시 노론 학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던 석실서원을 이끌고 있던 인물이었다. 
김원행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라 일컬어지는 농암 김창협의 양손자이자 김창협의 제자인 도암 이재의 문인이다. 도암 이재는 사화에 연루된 후 낙향, 후진 양성에만 힘을 기울였는데 김원행은 그의 문하에서 노론계 기호학파의 맥을 잇는 사상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김원행은 황윤석을 선뜻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찾아가 문안인사를 하고 경서를 읽다가 의문 나는 것을 묻는 등 성실하게 석실서원을 드나들었다. 이같이 노력한 지 3년, 김원행은 마침내 황윤석의 간청을 받아들여 제자로 입문할 것을 허락해주었다.
김원행과 만남은 황윤석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은 전환점이었다. 1756년 석실서원에서의 상견례를 시작으로 황윤석은 김원행이 죽기 전인 1772년까지 16년 동안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학문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재난고’ 1766년(영조 52) 2월 17일 일기에는 수구문(水口門) 밖을 출발, 춘천에 이르는 육로의 노정을 적었던 바, 여기에 석실서 주변의 지명과 거리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서 석실을 가려면 수구문을 통해 출발한다. 수구문은 원래 명칭이 광화문으로 사대문 사이에 방위별로 둔 사소문(四小門) 중 동남쪽으로 나가는 문이다.
이 문을 나와 10리쯤 가면 두모포(豆毛浦)에 이른다. 두모포는 현재 서울 옥수동 인근으로 이곳을 거쳐야 광화문을 통해 도성으로 들어가게 된다. 두모포에서 15리 정도 가면 광진촌(廣津村)에 이르고, 광진촌에서 미음진촌(渼陰津村)까지는 5리 정도다.
광진촌은 고대부터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미음진은 지금의 수석동 일대로 남양주와 하남시 미사리를 건너던 한강 나루터였다. ‘해동지도’에는 독진(禿津)으로 표기됐다.
이 미음진촌을 지나 3리 정도의 거리에 석실서원이 있었다. 수구문을 벗어나 석실서원까지 육로로 33리 정도였다. 지금의 거리 단위로 보면 약 13km 떨어진 거리였다. 석실서원에서 적실현(적실고개)까지가 10리이며, 적실현에서 거유령(수리넘이)까지가 7리이다.
그는 뱃길도 상세하게 적어 놓았다. 수로는 동대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동대문에서 미음진까지가 30리이며, 동대문에서 왕숙탄(왕잔여홀)까지 30리로 나누어 적었다. 또 왕숙탄에서 거유령까지가 20리라고 했다. 왕숙탄은 지금의 왕숙천으로 남양주와 구리시를 흐르는 하천이다.
황윤석은 1760년(영조 36) 8월 17일 일기에 석실서원 앞강에서 춘천 오산진에 이르는 뱃길과 거리도 적어 놓았다.
‘이재난고’는 노정이 재미있는 것은 당시 지명을 한글로 함께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로써 한자 지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서울에 과거를 보기 위해 갔던 황윤석은 1756년 윤 9월 28일 서울을 출발, 김원행이 머물고 있던 미음진촌에 이르렀다. ‘선조의 서원이 바로 가까운 곳에 있다’라고 할 정도로 석실서원과는 가까운 거리였다. 황윤석은 말을 타고 갔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발, 김원행의 미음진촌에 오후 무렵 도착했다.
한편 석실은 본래 지명이 적실(賊室)이었다. ‘이재난고’도 다음 처럼 등장한다. 석실서원을 지나 춘천 가는 길 10리 쯤에 ‘적실현(賊室峴)이 있으며, 속명으로 ‘적실고개’라 한다고 했다.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은 흥덕현 구수동(현재의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출신의 학자로 영조·정조 대에 살았던 호남 실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재난고'는 현재 52권 57책이 전하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11호로 지정, 황윤석생가는 시도민속문화재 제25호로 각각 지정됐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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