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희지 명필 뽑아 만든 서예교본 발견

양은용 원광대 명예교수 7일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 월례연구발표회서 발표

 

중국 왕희지의 집자비 ‘대당삼장성교서첩(성교서)’를 연구, 분석한 발표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무엇보다도 탁본으로 보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임서본으로 모습을 드러낸 경우는 흔치 않다. 양은용 원광대학교 명예교수는 7일 오후 2시 원광대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서 열리는 종교문제연구소 월례연구 발표회에서 ‘왕희지 집자비 ‘성교서’의성립과 구조’를 발표한다. 이에 간추려 소개한다.[편집자 주]

새로 발굴된 묵적(墨跡) 『대당삼장성교서첩(墨跡大唐三藏聖敎序帖)』(이하 『성교서첩』)은 개인소장이다. 소장자에 의하면, 조부가 별세하고 1995년 경 다락에 있던 유품을 정리하는 가운데 발견된 서책에 섞여 있었다. 
오래된 형태에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행서집자(行書集字)임을 알고,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구하는 한편, 탄소측정으로 그 가치의 중요성을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 묵적은 홍복사 승 회인(懷仁)이 집자하여 새긴 <대당삼장성교서비(碑)>(672)의 비문 원형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이 비문은 북송대의 여러 탁본이 전하며, 이들 탁본을 책으로 묶여 유행하는 것이『(왕희지)집자성교서(王羲之集字聖敎序)』(1979 서울 시청각교육사, 1987 日本 二玄社 등)이다. 
이들 유행본의 구성은 크게 4부분으로 이루어졌다. 태종의 <대당삼장성교서>(648), 고종의 <황제재춘궁술삼장성기(皇帝在春宮述三藏聖記)>(648), 현장(玄?, 602-664)삼장이 번역한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648), 그리고 회인이 기록한 <부기(附記)>(672)의 네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을 모두 합쳐 『대당삼장성교서』 혹은 『삼장성교서』로 부르며, 이 『성교서첩』도 이와 같은 내용이다. 
그러면 이 묵적 『성교서첩』은 어떤 형태의 첩책(帖冊)인가? 앞뒤는 감색 포(布)로 표지를 만들고, 표지에 한지 배지(背紙) 곧 바탕지를 붙여 이루었다. 배지의 뒤에는 당나라의 통치와 관련된 글이 다수 수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는 현장삼장의 『반야바라밀다심경』에 윤문으로 참여한 인물들이 나타나는데, 주희(朱熹, 1130-1200)찬의 『자치통감강목』에서 인용하여 기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서첩형태는 1200년대 전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에 오려붙여진 본문은 우선 형태에서 배지문 보다 훨씬 이전에 작성된 것임을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표지를 포함하여 48첩이 되는데, 이들 각 첩(쪽)은 가로 6 × 세로 39cm로 배접지 전체를 펴면 총너비가 450cm에 이른다. 첩을 접으면 높이가 3cm에 이른다. 이 첩의 각 쪽에 『대당삼장성교서』의 내용을 가로 5.3×세로 25cm의 크기로 오려 붙였다. 물론 작게 오린 부분도 있다. 글자는 큰 글자와 작은 글자에 다소 차이가 있는데, 큰 글자는 가로 2 × 세로 2.7cm, 작은 글자는 가로 1.5 × 세로 2cm이다. 이 글자 크기는 <대당성교서비문>에 새겨진 글자, 곧 유행본인 『집자성교서』의 크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이의 체제는 위의 이현사판 『집자성교서』와 같은 체제이다. 제목 및 본문은 올려서 배열하고, 집자자(集字者) 회인 등의 이름을 내려서 배열하는 방식이라는 말이다. 이는 <대당삼장성교서비>에서 취한 형태와 같다. 물론 이 중에서 피휘(避諱) 등은 <비>와 같이 나타난다. 이 <비>는 1132년 현재의 형태로 절단되었으므로, 유행본의 『집자성교서』는 그 이전에 탁본된 것으로 정교하게 오려서 배열하고 있다. 
이 묵적 『성교서첩』의 본문은 원래 서책의 형태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본문 중에 쪽 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곧 서책형태로 묶었다가 어떤 기회에 전체를 펴서 하나로 볼 수 있는 첩책형태로 오려붙이기를 했다는 말이다. 다만 오려 붙이는 과정에서 전체 내용을 완전히 숙지하지 못하고 여러 곳에서 앞 뒤를 잘 못 붙이는 착종이 나타난다. 물론 내용의 전체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면 이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는 회인이 <대당삼장성교서비>를 세우기 위해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한 원형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는 건비(672) 전에 이루어졌다. 둘은 북송 당대에 이루어진 탁본의 임모(臨模)로 이루어졌다는 견해이다. 탁본의 글자체와 다른 부분이 나타나기 때문인데, 묵사지를 대고 그리는 쌍구(雙句)방법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북송 대인 1200년 이전에 이루어졌다. 
결국, 이 묵적 『성교서첩』의 성립은 위의 두 설 가운데 하나가 되겠지만, 어느 쪽이든지 무가지보(無價之寶)인 것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회인의 왕희지 집자 진적(眞跡)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혹시 이 『성교서첩』을 두고 이르는 말일 가능성이 있다./정리=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