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서 그런지 짧은 가을이 아쉽기만 하다. 출퇴근길에 오가며 보았던 노란 지사 들판이 추수가 끝나자 날이 갈수록 퇴색해 간다. 가을빛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저 단풍, 저 갈꽃과 억새들이 지고나면 겨울이 올 것이다. 들녘은 추수로 갈무리하며 사람들에게 양식을 남기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이 가을을 채워 겨울을 날 것인가? 하루하루가 다르지 않는 일상에서 그걸 찾기란 쉽지 않다.
여행은 이런 단조로운 일상을 바꾸는 모멘텀(momentu)이 된다. 여행을 떠나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현지의 여정만이 여행은 아니다. 미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는 동안도 여행이다. 또 다녀와서 사진을 정리하고, 여행기를 쓰거나 주변사람들에게 후일담을 이야기하는 것도 여행의 연속이다. 젖었던 일상에서 탈출은 이토록 지속적으로 우리를 자극한다. 그 힘으로 다시 삶이 탄력을 받을 수 있으니 여행은 힘은 참으로 크다.
필자가 근무하는 지사중학교는 전교생 12명의 초미니 학교이다. 자체적으로는 체육대회도, 축제도 해내기 어렵다. 다행히 축제는 인근 초등학교와 함께 지역 축제로 꾸몄으나, 체격과 체력이 다른 체육대회는 함께 할 수가 없어서 포기했다. 그렇다고 운동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작년 스포츠클럽 탁구대회에서 전라북도 우승을 차지했으니 1970년대 사치분교 농구부 신화만큼이나 놀라운 성과로 회자된다.
이런 우리 아이들이 지난달 말부터 3박4일 동안 특별한 여행을 다녀왔다. 중국의 상해와 오진, 소주 지역으로 생애 처음 해외여행을 한 것이다. 여권을 만들고, 비자를 신청해 받고 들뜬 마음으로 기다리던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단순히 해외문화체험 자체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앞서 특별하다고 했듯이 학교에서 계획한 대로 학생들이 따라 움직인 평범한 체험학습이 아니었다.
모든 걸 학생들이 계획했다. 여정부터, 숙소와 식사 메뉴 등 세부적인 것들을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교육과정과 연계된 통합학습이었다. 장강(長江) 이남의 수향, 오진이라는 곳을 방문한 것은 지리, 소주의 정원들과 박물관을 찾게 된 것은 역사, 그리고 유적지의 현판과 비석들을 살피는 것은 한문, 기본적인 출입국 절차와 방법은 사회, 음식 메뉴는 기술·가정, 소통은 영어 등 모든 과목들이 직간접적으로 이번 체험학습으로 모아졌다.
그러다보니 현장에서도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자기들의 관심 분야에 집중했고, 특별히 생활지도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자기들끼리 협의해 통학 자원 봉사해주시는 차량 기사분의 선물도 살 줄 알고, 아침에 만나면 선생님들께 문안 인사도 깍듯이 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요즘 중학생들과는 다른 행보였다.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두말할 것 없이 학생 스스로 하게 한 데서 나온 것이다.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객체가 아닌 학생이 주체가 되고, 선생님들은 그야말로 도우미 역할만을 했다. 알아서 결정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지는 모멘텀을 여행이 만든 것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우리 아이들은 부쩍 성장했다. 교과서가 아닌 현장에서, 그리고 선생님이 아닌 자신들의 힘으로 배우고 익힌 것이다.
물론 작은 학교라서 가능했다. 그러나 큰 학교라고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학생이 많으면 소단위로 나누면 된다. 한 곳으로 수백 명이 몰려가는 것은 여행이 아니라 단순 행사다. 사고의 위험도 그만큼 커진다. 세월호 참사에서 우리 학교들이 반성할 점 중 하나는 한 곳으로만 전체 학생들을 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가고 싶은 체험처(여행지)를 받아서 몇 개의 소단위로 나누고, 이를 교육과정과 연계해 계획부터 실행까지 학생들의 통합학습으로 이어진다면 수업 참여도도 높아지고, 여행의 만족도도 높아질 것이며, 선생님들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다. 물론 기존의 획일적 추진보다 절차는 좀 복잡할 수 있다. 또 안 해본 것을 하게 되는 두려움도 크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무엇이 더 교육적인지 고려해야 한다.
들녘은 내년이면 다시 제 모습을 찾을 것이다. 풍흉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농사는 그대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다. 지나간 세월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루하루 알차게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특히 무럭무럭 성장하는 학생들의 시간은 더욱 그렇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들을 위하는 일인지 학교는 늘 고민해야 한다.
김 판 용(시인·전주경실련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