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으로 바라본 해남윤씨가 복원기
입체적으로 바라본 해남윤씨가 복원기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8.11.1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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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해남윤씨 가문 고문서 뭉치를 통해 `녹우당에서 고산을 그리다' 발간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여성, 향리, 무인, 서얼, 농민, 노비 등 민간 기층 삶의 단편을 해남윤씨 가문에 남아 있는 5천여 점의 고문서 뭉치를 통해 살핀 ‘녹우당에서 고산을 그리다’를 발간했다.
이 책은 고문서 중에서도 해남윤씨가에서 남긴 600년의 기록을 한글화하여 1차적 연구를 마친 후 현대적으로 재조명하여 발간, 눈길을 끌고 있다.
해남윤씨가는 고려 말 윤광전이 동정직에 입사하면서 관직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이후 노비상속 매매 등을 통해 사회·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16세기 초 사림파 가문으로 입지를 다지면서 가세와 경제력이 급격히 신장하였다. 파시조인 윤효정 때 해남의 향리였던 해남정씨의 무남독녀와 결혼하면서 재산을 축적하고 이 지역의 유력 사족과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바로 이같은 학파적·당파적 관계를 발판으로 17~18세기 초에 윤선도·윤인미·윤두서 시대를 거치면서 호남 남인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해남윤씨 가문에 남아있는 고문서와 고서가 5천 여점으로 그 속에는 교육과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하려는 노력, 관료로서의 성공과 좌절, 재산을 증식하고 이를 자손에게 물려주는 다양한 형태, 바다를 개척해가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단순히 해남윤씨의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여성, 향리, 무인, 서얼, 농민, 노비 등과 연계되어 삶이 유지되어 갔는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토지 소유를 실현하는 방법만 변하였을 뿐 토지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해남윤씨 녹우당(綠雨堂)은 경주 최부자, 구례 운조루와 더불어 ‘덕부(德富)’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양반 지주가이다. 조선부터 현재까지 격동의 기간을 거치면서도 이처럼 대지주로서 가세를 유지하고 발전시켜왔다는 사실은 누대에 걸쳐 실천한 관용과 적선 행위와 더불어 이 가문들이 지역사회와 얼마나 긴밀히 공존해왔는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지역을 대표하는 대지주였음에도 불구, 한말 동학농민군의 군세도 이들을 비껴갔고, 심지어 한국전쟁기 좌익 및 빨치산의 세력하에서도 침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역 내 이들의 도덕적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관용과 적선의 실천 속에서도 양반 대지주로서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더욱 높아졌다는 사실은 그 못지않게 권력과 토지에 대한 욕망이 강고히 실현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양반 대지주로서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공고하게 하려는 가장 안정적인 방법으로서 덕부의 실천을 바라보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비단 현재적 관점에서만의 평가가 아니라 선조와 효종 때의 녹우당의 토지에 대한 탐욕을 신랄하게 비판한 기록에서도 알 수 있다. <1715년 해남윤씨가 패지>와 <1850년 이병관 수표> 두 문서는 내용으로만 보면 적선 행위로서의 증거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살피면서 토지에 대한 욕망의 실현이 잘 드러난다.
<신해년 도임일기(辛亥年到任日記)>라는 문서를 보면 정조의 초대장을 받고 해남에서 수원으로 올라온 윤선도 후손이 1791년 1월 16일 밤에 정조를 만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내용 중 이채로운 점은 정조가 “잘생긴 사람이 벼슬에 오른다면 조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해남윤씨 녹우당 종가에는 1,000점에 이르는 많은 땅문서가 전한다. 그중 <1697년의 토지매매명문>은 ‘자화상’으로 널리 알려진 공제 윤두서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종 일복을 시켜서 토지매매를 대항하게 한 내용이다. 윤두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30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해남윤씨 종가의 막중한 책무를 맡고 많은 고민에 휩싸였다. 그는 집안의 여러 종 중 대대로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면서 검증된 일복이를 주목했다. 윤두서는 종가 인근의 논 2마지기를 사들이면서 일복이를 수노로 임명했는데, 일복은 40대부터 해남윤씨 종가의 종손 3대에 걸쳐 충성을 다한 공을 비로소 인정받은 것이었다. 이 문서를 통해 매매 과정에서 토지를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팽팽한 입장이 어떻게 조율되어 거래로 성사되었는지는 물론 노비 일복의 가족 현황까지도 살펴볼 수 있다./이종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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