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상의 동화 새로 읽기] 효녀 심청
[장윤상의 동화 새로 읽기] 효녀 심청
  • 장윤상 전북교육마당 이사
  • 승인 2018.11.21 18: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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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효녀 심청을 다시 읽어 보고자 한다.
심청전도 구전설화이기에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그 중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심학규가 심봉사로 나오는 이야기를 소재로 읽어본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효녀 심청 이야기를 대부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눈이 내리고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삯일 나간 딸 청이를 기다리다 못해 마중 나갔다가 그만 심봉사가 물에 빠지고 만다. 마침 지나가던 스님 몽운사 주지가 심봉사를 구해 주고 공양미 삼백석을 부처님께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고 한다. 그말을 들은 심봉사는 자기가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겠노라고 말한다. 주지는 허름한 옷차림의 심봉사에게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지만 심봉사는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겠노라 약속을 한다. 집에 돌아 온 심봉사는 그제서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며 고민에 빠진다. 효녀인 딸이 몇 번을 물어 주지와 공양미 삼백석을 공양하기로 약속 했다는 사실을 알고 청이도 고민에 빠진다. 궁리 끝에 안전한 뱃길을 원하는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삼백석에 팔기로 한다. 그렇게 팔려 간 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우여 곡절 끝에 왕비가 되어 봉사 잔치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반가움에 눈을 뜨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심봉사는 딸 청이를 젖동냥으로 길렀다. 애지중지 하였으리라. 고생도 많았으리라 짐작 된다. 하지만 부모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그런 아버지를 위하여 청이는 목숨을 바치게 된다. 심봉사와 청이는 왜 그렇게 공양미를 바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전전긍긍했을까? 당시에는 경솔한 약속일지라도 공양미 삼백석을 바치겠다고 부처님과 약속을 했으니 이를 어긴다면 눈을 뜨고, 못 뜨고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다음 지옥에 가서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믿었으리라. 아버지를 지옥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니 청이는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리고 선택한 수단이 자신을 파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안전한 항해를 위해 처녀를 바치는 인신공양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제물로 바칠 처녀를 원하는 뱃사람들에게 자신을 팔기로 한 것이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펴보자.
심봉사는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무능력하고 경솔하며 이기적인 인물이지만 특별하게 나쁜 인물은 결코 아니다. 정말 그럴까?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하여 자신의 지옥행을 대신한 딸의 목숨 값으로 뺑덕어멈과 새 살림을 꾸리는 나쁜 아비이다.
선원들은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인신 공양을 해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로 등장한다. 심청이의 사연을 전해들은 선원들이 300석 외에 심봉사가 살 수 있도록 백미 50석을 더 마련해 주는 착한 역할로 등장을 한다. 정말 그럴까? 선원들은 어렵고 힘든 사람의 입장을 이용하여 합의라고는 하지만 인신을 매매하여 제물로 삼는 용서해서는 안 될 범죄자들이다.
뺑덕어멈은 심봉사의 돈을 가로채고 도망한 나쁜 사람이다. 자식을 먹여 살리기 어려운 일반 백성들에게 양식을 빌려 주었다가 갚지 못하면, 딸을 빼앗아 가는 지주나, 관리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사례들은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을 뺑덕어멈으로 대신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뺑덕어멈을 그토록 미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몽운사 주지는 또, 어떤 사람인가? 심봉사의 몰골을 보면 공양미 한 석도 어려운 처지였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삼백석으로 눈을 뜰 수 있다고 말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봉사에게 눈을 뜰 수 있다는 간절함을 미끼로 너무 공양미를 요구한 주지 역시 몽매한 사람들을 현혹하여 수탈을 일삼는 그런 인물이다. 

과연 심청 이야기가 효도를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교훈적 의미만으로 오래 전해 내려오게 되었을까? 심청이야기가 민간에 널리 알려지고 전해 내려 온 것은 관리. 지주, 스님들에게 수탈을 당하여 자식에게 해줄 것이 없는 부모들이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슬픈 자화상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 심청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주며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불교에서 말하는 효, 도교에서 말하는 효, 유교에서 말하는 효,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효의 의미와 오늘날의 효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맹목적인 신앙, 맹목적인 사상이나 이념, 맹목적인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폐해를 가져오게 되는 지 우리는 많은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다. 
이제 효와 충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 그리고 실행 방법이나 수단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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