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창] 채상소고 백남윤 명인의 제자 허영욱
[전북의 창] 채상소고 백남윤 명인의 제자 허영욱
  • 허 영 욱 전주전통농악보존회 이사장
  • 승인 2019.01.10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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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속촌 개관과 동시에 전주농고 농악부 자매결연
대한민국 제일의 농악단으로 발돋움”

 

제가 고등학교를 입학한지도 어느덧 2개월째 되던때 저는 지금에 주특기가된 채상소고 명인이신 (고)백(白)자 남(南)자 윤(允)자 (백남윤)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선생님은 채상소고와 함께 반세기를 전북 김제군 박동리에서 살아오셨다. 백남윤 선생님은 일찍이 두메산골 전북 장수군 번암면에서 태어나 번암국민학교를 9살 때 입학했으나 11살이 되던해 동네 총각들의 농악놀이에 미쳐 4학년때 중퇴하고는 굿판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때가 11살 때였다. 동네 농악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던 어린이들은 쫏겨났지만 농악을 배우겠다는 의욕만 보이면 동행을 허락했단다. 
결국 농악에 반해버린 백남윤선생님은 아버지로부터 일곱 번이나 혼이났다고 한다. 
3남 2녀중 둘째인 선생님은 밤낮없이 농악단 심부름 끝에 간신히 마련했던 법고 일곱 개가 아버지의 도끼에 박살이 났다고도 전한다
14살되던 1931년 3월 선생님은 개나리 봇짐에 오직 소고만을 간직한채 당시 농악계를 주름잡던 정읍군 태인면 김도삼(金道三) 씨를 찾았다.
차돌처럼 야무진 백남윤선생님을 기꺼이 받아들인 김도삼씨는 백남윤선생님에게 괭과리도 가르치고 장구도 가르쳤다. 또한 무용을 배우도록 했고 유연한 동작이 맘에들어 소고를 주특기로 가르쳤다고한다.
5년동안 선생님은 각종 굿거리를 배웟고 19살 때는 부안군 산내면 김바우씨에게 자리를 옮겨본격적인 수업을 받았다. 툭차고 앉을상. 차고돌상. 외상모가락 등등 묘기를 3년간 사사받았고 22살때는 남사당에서 소고를 전공한 정주시 김광래씨를 찾아 특수기능을 익히기 시작했다고한다.
연풍대가락이며 자반뒤집기가락. 마당재가락은 물론 어깨에 소고를 끼고 돌상. 두류거리. 반앉을상 등등 5년간 익힌 기술은 전국 최고의 묘기로 성장했다. 
28살이된 해 정읍농악단의 창립멤버가된 선생님은 수 법고역(首 法鼓役)을 맡으면서 후배를 양성했고 창립 다음해인 1946년에는 서울 창경원에서 개최된 전국농악경연대회에서 단체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남한농악대회 최우수상등 단체상은 물론 수법고로 받은 개인우수상은 숱하게 많다.
채상법고의 제 1인자로 세상에 알려진 선생님은 44살때인 1961년 강원도 주천고등학교 농악지도 강사로 첫발을 내 디딘후 1963년엔 서울 백민선 무용소에서 농악을 지도했다.
백남윤 선생님의 스승이었던 김도삼(金道三)의 삼채가락. 김바우의 무용. 김광래씨의 상모놀이등 선생님이 터득한 모든 것은 일기장과 함께 영원히 간직됐다.
저는 1969년 4월부터 (고)백남윤 선생님으로부터 채상소고(뻣상모)를 2년간 사사받은 후 지금껏 50년을 (고)백남윤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받은 채상소고(뻣상모)를 현재까지 보존 계승하면서 제자들에게 보급 저변확대를 위해서 노력 지도하고 있다.
농악부 재학시절 고된 연습과 훈련으로 힘들게 배우면서 방학때면 남들은 방학이라고 쉴만도 하지만 농촌예술반 학생들은 방학 다음날부터 전국민속경연대회를 출전하기위해 지금의 전북 완주군 구이면 두방리 마을 느티나무 그늘진 곶에 합숙 자리를 마련하고 1달간 아침 6시에 기상과 함께 아침 점심 저녁식사 시간을 뺀 나머지 10시간씩 고된 강훈련을해야 했고 먹는 것이 부족하여 동네 또래 친구들에게 밤이면 옥수수 감자를 얻어먹어 가면서 연습을 했지요.
밤이면 동네 정자에서 잠을 청해야 하지만 워낙이 모기가 많아 모기도 많이 뜯기면서 참으로 고생 고생을 다한것 같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됐습니다. 
2학년도 1학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반복된 학창시절이엇고 1970년 10월 대망의 꿈구던 제11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으로 명예를 얻으며 전주농림고등학교가 농악으로 승승장구 하면서 명실상부한 학교가 되었습니다.
대통령상을 계기로 1974년 10월 3일 경기도 용인시 신갈에 한국민속촌을 개관하면서 전주농고 농악부와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단장 정인삼(鄭仁三)과 부단장 허영욱(許英旭)을 비롯 31명이 한국민속촌 농악단 창립 창단 멤버로 입촌하면서 그 화려했던 농악이 전국적으로 입소문으로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제일의 농악단이 되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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