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어느 철학자의 삶' (17)새로운 도시. 새로운 삶
[연재소설]'어느 철학자의 삶' (17)새로운 도시. 새로운 삶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9.02.18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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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정윤성

몇 번의 회동만으로 이미 넌 새로운 동네를 접수했고 새로운 도시를 읽었으렷다. 첫 산책길에 나섰던 너는 고도의 신중함으로 또 한 번 날 놀라게 했지. 마킹은커녕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으려던 특이한 너의 행동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지.
익숙치 않은 거리와 상점들, 생소한 냄새는 감히 네 영역으로 점찍기엔 머쓱했나봐?

첫 행보를 그렇게 절제하고 또 절제하더니, 두 번째 날 산책길에선 전날 숙고하고 침잠했던 너의 역동성은 마치 전광석화와 같더구나. 생각한 뒤 행동한다. 보리 너의 철학이자 신념이 아니더냐.
인간친화적인 동네는 너를 비롯한 동물들에게도 친화적이란 걸 알게 되었다.사생활이 존중되는 이웃들 간의 섬세함, 낯선 이에게도 ‘안녕하세요’를 먼저 건네는 따뜻함, 조용함이 신조처럼 받들어지는 경건함, 자연과 동물에 우선순위를 둔 관대함은 네게도 공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몇 번의 산책을 거치며 깃털처럼 가벼워진 네 사지의 춤사위를 보면.
상점의 테라스마다 아침인사를 건네는 개들이 공존하고 있음에 우리의 산책길이 더욱 유쾌해질 수밖에. 테라스 앞에 놓인 안내판의 문구는 너와 내가 진정 바라던 공기를 호흡하고 있다고 연발하게 하였지.
‘반려동물도 입장가능’ 얼마나 품위 있고 너그러운가. 폐쇄적일수록 마음도 축소하나보다. 조금만 관대하면 더 행복해질텐데. 내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팁을 얻었구나. 너로 인해서.
서점운영을 위해 감행되어야 할 나의 주말이동 동안 익숙했던 옛 터전에 대한 그리움이 외로움으로 너를 역습하지 않을까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조금은 상쇄시킬 수 있는 기억의 전리품들을 난 잊지 않았지. 너를 위해 말이다.
짧지 않은 산책을 마친 후 너는, 대학신입생의 핑크빛 꿈에만 부풀어 있다가 혈전에 비유되는 합리적인 수강신청을 위한 에너지를 죄다 쏟은 뒤 침대에 쓰러진 그린의 밑에 자리 잡고 단잠에 빠져있구나. 지극히 대조적이지만 아름다운 그림이다.
정오가 한참 지났구나. 개수대 위에 자리한 조그만 창에서 쏟아지는 자연광이 가장 눈부실 때가 이 시간이었네. 풍부한 빛은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것 같아. 그러한 이유로 조명과학이 말그대로 눈부시게 발전해 왔겠지. 이런 부엌에서 밥을 짓고 야채를 다듬는 일은, 근사한 직무라도 맡은 듯 나를 흐뭇하게 하네. 
“보리야! 이렇게 향기로운 냄새가 널 언제까지 단잠에 빠져있게 하는지 보자.”
‘난 자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냄새는 물론 메뉴까지 열거할 수 있어요!’
“그래도 요리하는 내 옆에 있으면 함께 즐거울 텐데, 안 그래?”
‘더 즐거운 걸 아니까. 메뉴를 즐기는 것.’
그래 그 메뉴를 즐긴 후엔, 서점출근 대신 도서관 방문은 어떤지. 서점출근에 대해선 이미 은퇴한 보리니까. 도서관에 자주 출몰하는 강아지로 소문이 나서, 사서 보조로 발탁되는 기대도 품고서 말이다. 서점개의 영광을 우리는 기억하니까.
이렇게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삶은 영글어간다. 희망과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채. 
너는 늘 꿈꾸는 강아지였으니까. 늘 꿈을 이루는 강아지니까.
/조정란(인문학서점 조지오웰의 혜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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