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삼례
내 고향 삼례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3.12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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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양우식 시인
양우식 시인

동요(고향의 봄) 은 고향을 생각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동요이다.
내 고향은 꽃피는 산골은 아니고,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는 읍 단위 시골동네다. 지금도 승용차로 한 달음이면 갈 수 있는 곳,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내가 자란 시골동네는 변한 게 아니라 아예 없어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며 뒹굴고 놀던 마을 뒷동산도 마을 뒤로 도로가 뻥 뚫려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봄이 오고 잔디에 물이 오르면 어릴 적 무리 지어 놀던 뒷동산이 그립다. 여름이나 가을날엔 뒷동산 낮은 언덕에 굴을 파놓고 두더지처럼 종일토록 흙장난하고 놀아도 지치지 않았다. 해질녘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 연기가 굴뚝에서 피어오르면 높게 날던 잠자리들도 낮게 내려와 쉴 자리를 찾았다.
내 고향은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이다.
삼례는 사통팔달의 고장으로 삼례우체국 네거리에서 인근 지역으로 가는 길을 물으면 이리 가면 이리(익산의 옛 지명), 저리 가면 전주, 고리 가면 고산, 그리 가면 금마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조선 시대 삼남대로 최대 역참지가 있던 곳이며, 이 같은 정보통신의 중요성 때문에 동학혁명 당시 동학 농민군의 총지휘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동네에서는 한참 떨어졌지만 아름다운 간이역이라던 삼례역 대합실도 헐어버리고 건물을 새로 지었다가 그나마도 팽개치고 멀찌감치 옮겨졌다. 삼례역을 지나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길게 울리면, 정들었던 간이역을 볼 수 없는 아쉬움에 토해내는 긴 울음소리로 들린다. 이왕 옮겨갈 거라면 왜 그렇게 헐어버려야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이곳을 지나게 되면 소중한 것 하나가 뭉텅 잘려나간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일제 강점기 때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던 삼례, 이곳 삼례역에서 곡물을 모아 군산항으로 옮겨졌으리라. 뼈아픈 과거를 겪어온 삼례역 앞 농협창고만이 옛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지금은 문화 예술촌 으로 개축하여 운영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강산이 바뀌고, 오가며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도 바뀌었다. 어쩌다 고향 동네를 한 바퀴 돌아도 아는 사람 한 분 만나기 어렵다. 여름밤이면 동네 삼거리 가로등 아래로 불나비처럼 모여들던 사람들이 그립다. 장기를 두거나 구수한 입담으로 찰지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던 사람들! 모두가 탈농촌이 되면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추억 속의 흑백사진이 되었다. 어른, 아이 구분 없이 둘러앉아 놀던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많던 또래 친구들은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어른들과 아이들이 놀던 그곳이 지금은 너무 낯설다.
수구초심이라고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데 옛 고향의 흔적들을 시나브로 잃어버리고 지워버리면서 진행된 도시화가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하게 해주었을까? 우리 고향만큼은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농경시대로 돌아가자고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을 하면 좋겠다. 그래서 그 옛날 고향의 풍경을 되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때로는 그리워 찾은 고향 길에서 지워진 것들을 되돌릴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발걸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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