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민족교육 산실·인재양성 요람의 거목으로 잘 컸다
100년 민족교육 산실·인재양성 요람의 거목으로 잘 컸다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9.04.02 17: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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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교 100돌 맞는 고창중고등학교 총동창회 정 남 기 회장

`‘갈재맥 받아온 성산 기슭에 우뚝이 서 있는 웅대한 집은 빼나고 씩씩한 쾌남아들이 나날이 자라나는 고창 밭일세. 이 밭에 자라난 보리, 십삼도 근역에 두루 퍼지고 이 밭에서도 자라난 보리, 온 세계 곳곳에 씨가 되겠네. 씨가 되겠네’
조선 첫 민립(民立)학교이자 호남 지역 첫 민족사학인 고창중·고(고창고등보통학교)가 14일로 개교 100돌을 맞는다. 고창중·고등학교는 1919년 4월 14일 설립됐다. `민족교육의 산실, 인재 양성의 요람' 고창고등보통학교는 3·1운동의 민족정신을 승계한 교육의 전당이며,`지성, 근로, 실천의 전인 교육'을 교훈으로 민족정신 함양에 앞장서 왔다. 애국충정과 흥학보국(興學報國)의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세워졌으며, 교가(校歌)에도 바로 이같은 창학(創學)정신이 깃들어 있다. 조선인이 학교를 설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일본인이 운영을 했지만 1차세계대전 후 경제 공황의 여파로 폐교의 위기에 빠지자, 고창군민 5,500여 명이 뜻을 모아 '민족 문화 향상'과 '인재 육성'을 목적으로 학교를 인수, 경영키로 하면서 1922년 '조선 최초'의 민립 학교로 재탄생했다. `십시일반' 고창 군민의 자발적인 힘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지금까지 1만6,000여 명의 동문이 배출됐으며 한국 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하고 있다. 정남기 고창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74, 서울 거주)으로부터 지난 백년 역사를 들어보면서 밝은 내일을 전망해본다.
/편집자 주

 

△개교 100주년을 맞아 소감 한마디만 해준다면.

고창고보가 4월 14일자로 2019년 개교 100주년을 맞이합니다. 과거 북(北)에는 오산고보(五山高普)요, 남(南)에는 고창고보(高敞高普)가 민족사학의 쌍벽이었습니다. 고창고보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수많은 선배들이 일제와 맞서 싸웠습니다. 민족 교육을 통해 항일(抗日) 정신을 고취시킨 항일독립운동의 본산이었습니다. 고창중.고는 호남에서 인문계학교로는 처음으로 100주년을 맞는 훌륭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합니다. 공립이 아닌, 사립으로 개교했으며 그 주인이 어느 개인이나 특정 단체가 아닌, 군민들이 재원을 모아 세운 학교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는 지난해 비전선포식을 갖는 날 “저희 조부께서 1919년(고창고보 군민 인수)에 모금 운동에 크게 기여했다”고 했습니다. 사족이지만 홍영표동문은 뜻밖에 국회식당에서 100주년 비전 선포식을 마련해주어 고마웠지요. 고등학교 시절 가난한 농촌에서 우정을 나누며 꿈을 키웠던 벗들이 그립군요. 오늘따라 학생 회장 선거에 나와 떨어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성산 기슭의 기운이 좋아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고창의 동쪽으로는 진산(鎭山)인 방장산(方丈山), 반등산 (半登山), 북쪽에 성산(聖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동남쪽으로 모양성에 둘러싸여 지세가 높고, 서남으로 바다를 향해 트인 고창읍의 지형을 행주형(行舟形)입니다. 이에 중앙에 돛대(檣)를 세우고, 앞이 트이고 허한 남쪽과 서쪽에 각각 진남(鎭南)과 진서(鎭西)에 세운 염승풍수(厭勝風水)의 대표적인 예로, 지리비보(地理裨補)사상의 유물로도 대표적인 예입니다. ‘성산(聖山)’은 한자를 풀이하면 ‘성인(聖人)의 산’입니다. 그다지 높지 않은 성산은 고창의 주산인 방장산에서 출발합니다. 벽오봉 서쪽을 향해 구붓구붓 이어오는 산굽이를 내려오면 동서대로의 지하도가 나옵니다. 고개를 들고 쳐다보면 우뚝 솟은 속칭 필봉이 보이는데, 거기서부터 높고 낮은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멈춰버린 산이 바로 성산입니다. 필봉에서 성산기슭까지 안겨있는 마을들이 법정리의 교촌리이고, 그 중심이 교촌마을입니다.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1872~1942)선생은 1926년 병인(丙寅) 3월 중순, 고창고보 교사 준공을 기념해 고창의 역사와 주변 산천의 아름다움을 ‘성산기(聖山記)’ 라는 이름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새로 지은 교사를 “으리으리하여 화엄누각과 같이 우뚝 솟아있다(傑然如華嚴樓閣湧出地上)”고 표현했습니다. 성산은 오늘도 고창고등학교를 북쪽에서 둘러 막아 아늑한데다가 울창한 소나무들이 연륜을 더해 지금의 왕소나무가 됐습니다.

△개교 100주년 행사가 성대하다고 들었는데.

고창중·고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 행사가 12일부터 14일까지 고창고등학교 교정과 동리국악당에서 동문 3,000여명과 군민과 관람객 등 1만여 명이 함께하는 고창군 최대 행사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연극 공연은 동리국악당에서, 골프대회는 골프장에서 각각 열립니다. 또, 청소년 페스티벌, 전야제, 군민화합한마당, 100주년 기념탑 제막 등 다채로운 행사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펼쳐집니다. 탑의 높이가 10m니까 하늘 높이 솟아올라 학교의 위용을 뽐낼 것 같습니다.
13일 오후 7시 고창고등학교 운동장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개교 100주년 기념 전야제 축하공연엔 진성, 김용임, 소찬휘, 박현빈, 김유라 등 트롯 스타들이 출연합니다. 전야제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군민과 동문이 함께 부르는 교가 제창과 아름다운 밤을 수놓을 불꽃쇼가 준비돼 있습니다. 이번 특별공연은 물론 무료로 열리며, 당일 오전 무료 입장권을 배부할 예정입니다. 재학생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도 마련했습니다. 대학로 최고 코미디연극 보잉보잉은 12일 동리국악당에서 특별 공연을 합니다.
군민 장기자랑, 청소년 페스티벌, 동문 장기자랑, 체험존, 먹거리, 포토존, 판매부스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마련했습니다. 또하나 개교100년사를 편찬해 학교 역사를 오롯이 후대에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가장 의미있는 사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00년을 넘긴 인문계학교가 손꼽을 정도인 바, 이제 우리 모교도 100년사를 편찬하여 선배들과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께 바치고 싶습니다. 외부에도 많이 알려 자랑하고 싶습니다. 100년사는 이번 100주년 행사를 수록한 후, 5월중에 발간할 예정입니다. 100주년 발전기금을 모아 사업과 행사경비에 충당하고 남는 재원으로는 이에 걸맞는 뜻있는 일에 쓸 계획인데요,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쪼개 헌금하는 동문들의 모교사랑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농촌지역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연과 함께 성숙하는 모습은 자랑스럽고 대견합니다. 도회지에서 자라는 학생들은 그만큼 소음, 먼지 등 공해에 시달리며 차량, 그리고 건축물 등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창에서 생활하는 후배들은 그만큼 상대적으로 행복한 여건에서 생활하고 있지요. 자연과 더불어 웅지를 키우고 훌륭한 선배들의 뜻을 받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한다면.

고창중·고가 고창고등보통학교로 출범할 때 당시 고창의 유력 인사들이 설립에 소요되는 재원을 염출했지요. 따라서 고창중·고의 주인은 고창 군민들입니다. 그 학교가 이제 100주년을 맞았으니 동문은 물론이지만 군민의 입장에서도 자랑스럽고 가슴 설레는 경사입니다. 이번 개교100주년 잔치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고창 군민 모두를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의향(義鄕)’ 고창에서 의로운 인물들이 배출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어야 합니다. 이번 100주년을 계기로 한층 성숙해질 것이고, 그래서 이번 행사에 군민들이 손잡고 참여해 주십시오. 우리가 배웠고 후손들이 배우는 배움터가 더욱 활력을 불러일으키도록 학교와 학생들에게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정남기 고창중고 총동창회 회장-정남기 회장은 고창 아산면 주진리에서 태어나 고창중학교, 고창고등학교,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합동통신(현 연합뉴스)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80년 기자협회 제작거부 투쟁 사건과 관련해 해직된 뒤, 전자시보(현 전자신문)에 입사,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그 뒤 1988년 연합통신사로 복귀해 조사부장, 편집부장, 논설위원실장과 연합뉴스 동북아정보문화센터 상임이사 겸 소장을 맡았다.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한국편집미디어협회 부회장,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의장,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고창중고등학교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간추려본 100년의 역사

고창고등학교는 1919년 4월 14일 사립 오산학교(양태승 교장 대리 임명)를 인가, 1923년 7월 7일자로 교명을 정식으로 ‘고창고등보통학교’로 개칭, 인가를 받았다. 그후 향교의 명륜당과 사마재와 구 고창군 청사를 임시 가교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매하 양태승은 속리산으로 온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당시 북에는 오산고보, 남에는 고창고보가 있어 ‘북오산 남고창’이라 했다. 일제는 위안부와 학병 동원에 교사와 지식인을 앞장세웠다. 해직당하지 않으려면 창씨개명을 하라고 핍박하므로 많은 지식인이 흔들렸다. 하지만 양태승선생은 “굶어죽을지언정 창씨개명은 못한다”며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10여년 전 ‘매하 양태승 평전’이 출간되고, 201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그에게 주어진 까닭이다.
1923년 12월 10일에는 고창읍 읍내리 성산(聖山) 기슭에 터를 골라 부지 7,346평에 신축 교사 290평의 공사를 착공, 1925년 6월 25일 본관 1동의 준공을 보게 됐다. 1924년 3월엔 고창 땅에서 처음으로 졸업생 7명을, 그 다음해에는 제2회 졸업생 9명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제1회 졸업생 7명의 지역 분포를 보면 고창 2명, 서울 1명, 경기 1명, 경북 1명, 평북 1명, 평양 1명의 출신이었다. 제1회 졸업생의 지역 분포가 예시해 주듯, 역대 고창고보 학생들은 13도에서 모여 들었다.
 `갈재맥 받아온 성산 기슭에/ 우뚝이 서 있는 웅대한 집은/ 빼나고 씩씩한 쾌남아들이/ 나날이 자라나는 고창 밭일세/ [후렴] 이 밭에 자라난 보리/ 십삼도 근역에 두루 퍼지고/ 이 밭에서도 자라난 보리/ 온 세계 곳곳에 씨가 되겠네, 씨가 되겠네’
바로 이같은 상황은 당시 교사였던 심준섭이 작사하고 현제명이 작곡한 고창고보의 ‘교가’에서도 말해 주고 있다.
초창기의 교사들은 양태승(교장 대리), 이종오(이화학, 생물, 실업), 송태회(국어, 한문), 심준섭(일어, 교무주임), 김연건(영어), 이혁(일어, 일본 역사), 유찬식(수학), 정인승(영어), 이병학(체육), 홍순복(영어), 이세종(생리위생, 교의), 진규상(서무, 고창군에서 옴), 그리고 일본인 교사 1인(일어)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송태회, 유찬식, 정인승, 이병학은 더욱 유명하다. 전주 신흥학교 전 교사와 학생의 전입 사건이 있었다. 신흥학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자 폐교를 당했다. 그리해 전교생과 교사는 일체의 학교 비품까지 옮기며 고창고보에 통합했다. 교사·학생들이 비록 영어 단어나 수학에서 수식을 푸는 데는 다소 서투른 경우가 있다 해도 애국적인 민족정신은 그 어느 학교, 어느 졸업생보다 우수하는 등 민족사학(民族私學)으로
이름 높았다.


정기동 군산대 명예교수가 말하는 고창고보

정기동(鄭基東) 정치학박사는 군산대학교 명예교수로, 전북교육개혁시민연대 고문, 전북평화통일연대 고문 등을 맡아 지금도 이 사회의 작은 고임돌을 자처하는 인물이다. 그는 고창군 대산면 광대리에서 출생, 고창고등학교를 26회로 졸업한 후, 중앙대학교 정치학과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를 거쳐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일제시대엔 1道(도) 1고보(高普)는 高等普通學校의 약칭)의 정책이 전국에 시행됐지요. 통상 1지역에 단 1개의 학교만이 만들어졌던 시기이지요. 하지만 예외로 전북과 평북엔 2개의 고보가 존재했습니다. 공립 전주고보와 사립 고창고보, 그리고 공립 신의주고보와 사립 오산고보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올해로 아흔을 맞이한 그는 아직도 과거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가운데 말을 이어갔다 “부(지금의 시), 읍, 면으로 행정구역이 구분된 당시 고창면에 고창고보가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과도 같지요. 당시엔 부와 읍에 학교가 없는 곳이 수두룩했는데 말입니다. 덧붙여 제 생각을 한마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1914년 행정개혁이 이뤄진 바, 무장현이 제일 크고 고창현과 흥덕현이 그 다음이었지요. 그래서 군으로 통합될 때 마땅히 무장이 되어야 했지만 고창으로 바뀐 것은 무장기포 등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정읍의 경우, 고부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지 못한 것 또한 동학으로부터 비롯된 것 같아요” 고창고보가 한때 문을 닫을 뻔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군민들이 소중한 재산을 학교를 살리는데 신시일반으로 내놓았다. 아마도 면 단위에서 1개 군민들이 합심해 학교를 살리는데 앞장선 것은 세계적으로, 전국적으로도 드문 일이리라. 바로 이것이 고창의 정신이며, 동학의 진원지가 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설명이다. 조선8도가 서슬퍼런 폭압의 시대에 부정부패를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는데 고창의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다시금 고창의 불의와 정의가 회자되는 까닭이다.
그는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다는 삶을 영위했다. 1945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고등학생 신분으로 여운영의 건국동맹에 참여, 비밀결사 항일운동을 했다고 했다. 그는 연락책으로 쪽지와 문서 등을 전달하는 일을 도맡았다.
손문이 쓴 ‘천하위공(天下爲功)’이란 네모난 뱃지가 그의 왼쪽 가슴에 달려 있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개인의 영달이 아닌, 공적인 일, 즉 선공후사(先公後私)라는 의미다. 이는 1990년대 한, 중,일 정치학 전공자 극동평화문제 세미나에서 받은 것이다.
“한국의 통일이 없으면 세계 평화가 없다”는 생각으로 그는 오늘도 교육개혁과 평화통일을 위한 열망을 담아내는 일을 삼백예순다섯날 계속하고 있다. ‘좋은 일은 남이 다 안해도 나는 해야 하고, 좋지 않은 일은 남이 다해도 나는 하지 않는다’는 그의 좌우명이 떠오르는 이 늦겨울 이른 봄에서는./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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