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어느철학자의삶'](24)역방향이어서 가능한 것
[연재소설`어느철학자의삶'](24)역방향이어서 가능한 것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4.08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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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마다 반복되는 귀환길. 플랫폼에 들어서기 전 커피 한잔. 이미 머리에 입력돼 있지만 강박관념이 발동해 확인해야 하는 전자티켓. 착석하자마자 거치대 위에 놓이는 노트북.
하지만 오늘은 모든게 헝클어졌다. 좌석이 역방향인 관계로. 열차의 움직임과 동시에 시야에 들어 온 풍경은 눈에 피로감을 가져오더니 이내 두통으로 발전했다.

노트북을 덮고 눈을 감는다. 여정을 적셔줄거라 기대했던 커피는 방해물로 전락해 일찌감치 홀더에 봉쇄된다. 적어도 열차에서 내릴 때까지는 부름을 받지 못할 처지리라. 
눈을 감아도 잠을 청하는 건 아니기에 주변의 소음은 고스란히 뇌에 저장된다. 나와 마주보고 있는 좌석...정방향의 좌석...에 앉은 커플이 특히 존재감을 과시한다. 이 중년 커플의 애틋함은 청년의 열정 저리가라다. 속삭이고 기대고 웃음을 터트렸다가도 정색하며 함께 뭔가에 골몰하기도 한다. 제발 멀미는 두통에서 끝났으면 하지만 이들의 소란스러움은 점차적으로 나의 위까지 위협한다. 오 노우!
이럴 때 유용한 이어폰이라도 지참할 걸. 
남자가 잠깐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여자는 핸드폰을 꺼낸다. 메시지 창을 열고 한 개의 번호를 지우는 여자를 본 나는, 자리를 비운 남자가 언제 들어닥칠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열차 안의 화장실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그 순간은 빨리 올 것이다. 여자의 손이 갑자기 빨라진다. 남자가 자리에 착석할 때는 이미 핸드폰이 가방 안으로 숨은 다음이다. 
차창 밖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린다. 슬로우 모션으로 리와인드 하는 영화 속 장면처럼 눈에 익숙하지 않아 다시금 눈을 감는다. 안이든 밖이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풍경인 것만은 사실이니까.
오늘은 경유역도 다르고 종착역도 다른, 모든 게 어색한 귀환길이다. 참을성이 바닥을 드러낼 때 즈음 열차 안 대부분의 승객들이 소란스러워진 걸로 봐서 어느덧 종착역에 당도했나 보다. 
열차가 점차 서행을 하자 난 성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일어선 채 정방향으로 바꾸니 드디어 차창 밖의 풍경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한강에 걸터있는 수많은 다리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발광하고 있다. 열차가 역사에 완전히 정차를 하자 수많은 인파가 열차에서 빠져 나간다. 일부는 나처럼 해방감에 사로잡혀 가벼운 발걸음을 이어갈 것이다.
여정 내내 가방에 처박혀있던 핸드폰을 꺼낸다. 나의 묵묵부답을 원망하는 여러 개의 메시지가 내 양심을 자극한다. 빨간 숫자가 밑에 있는 순서대로 답신을 한다. 이것도 역방향인가?
그때 마침 핸드폰이 울린다. 그린에게서 온 전화지만 화면엔 보리의 얼굴이 있다. 
“엄마 어디예요?” “응 오늘은 다른 역에서 내려서 좀 지체될 것 같아” “보리가 벌써 현관문 앞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 보리는 역행을 할 일이 없지.”
거꾸로 왔어도 내일은 올 것이다. 기대로 가득 찬 내일. 이 밤이 아름다운 이유는 내일을 있게 해서이다. 불편했던 여정은, 지금의 나를 더욱 편안하게 한다. /조정란(인문학서점 조지오웰의 혜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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