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남해(南海)에 사는 원추(鴛鰍)라는 새를 아는가?”
“자네, 남해(南海)에 사는 원추(鴛鰍)라는 새를 아는가?”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4.2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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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인문학을 엿보다 27-박제가 & 장자

“나와 당신이 이미 알듯이 `어떻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인가?'는
물가에서 찾을 수 있다(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

채하: 선아야, 초정(楚亭) 박제가에 대해 들어봤니?
선아: 18세기 후반기의 대표적인 조선 실학자였던 박제가를 말씀하시나요?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고 양반교육을 받기는 했으나 신분적인 제약으로 사회적인 차별대우를 받았던 분이셨죠. 그런 까닭에 봉건적인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선진적인 실학사상을 전개하셨고요. 조선후기 이용후생학파의 계보인 ‘홍대용-박지원-박제가’의 한 분으로 국내 상업과 외국 무역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도시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였죠. 대표적인 저서로 ‘북학의(北學議)’가 있습니다.

채하: 선아가 박제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의외구나.
선아: 그런데 그 분 이야기를 꺼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연암 박지원과는 다르게 문학사적으로 족적을 남기지도 않으셨는데.
채하: 박제가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는 사실을 모르지? 사람들은 그를 실학자로만 생각했기에 화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 점에서 실학자의 경계를 넘어 철학자이자 화가로서 박제가가 그린 그림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선아: 생각해보지도 못했어요. 한국사 시간에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흐름에서 박제가 선생을 만났을 뿐이지 그의 그림은 떠올려 본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가 그린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가요?

어락도(박제가, 18세기)
어락도(박제가, 18세기)

 

채하: ‘어락도(魚樂圖)’라고 ‘물고기의 즐거움’이란 뜻이다.
선아: 물고기의 즐거움이라... 무엇인가 깊은 속뜻이 있는 것 같아요.
채하: 박제가는 독특한 예술관을 세우며 그림제작과 감상을 즐겨했던 지식인이며 예술가였다. 대게 전체적인 윤곽을 강조하며 산수, 화초 등을 모두 그렸는데 어락도는 매우 세밀하게 물고기의 비늘까지도 그려 독특하다. 특히 이 그림 위에는 중국 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한 명인 장주(자)가 쓴 <장자>에 나오는 “지지이문아, 아지지호상야(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라는 문장이 있다.
선아: 그 뜻이 무엇이에요?
채하: 직역하면 “그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물었지, 나는 그것을 물가에서 알았다네” 라는 뜻인데 글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장자와 혜자의 관계와 만남, 또한 그들이 물고기를 보며 벌인 논쟁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혜자는 장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치가이자 학자인데 장자를 만나기만 하면 논쟁을 걸었고 그 때마다 장자에게 당했다. 마치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당시 여러 소피스트들과 벌인 논쟁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는 장자가 혜자를 보러 양나라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혜자에게 가서 “장자가 혜자의 재상자리를 탐하여 온 것 같다”고 말했고 혜자는 놀라 신하들을 풀어 밤낮으로 장자를 추적하게 하는데서 시작된다. 즉 이 상황에 처한 장자는 혜자를 찾아가 말을 한데서 비롯된다.
선아: 흥미로운데요. 지금도 그런 조직이나 주변에서 스스로의 못남을 자각하지 않고 누가 내 지위를 가져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장자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채하: 그 이야기는 장자 외편의 ‘추수(秋水;가을철의 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장자가 혜자에게 말하기를 “자네, 남해(南海)에 원추(鴛鰍)라는 새가 있음을 아는가? 그 새는 남해에서 북해까지 날아가는데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도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도 않고, 단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도 않지. 그런데 올빼미 한 마리가 썩은 쥐를 잡았는데 그때 마침 원추가 그 위로 날아가자, 올빼미는 꽥 소리를 질러 원추를 놀라게 했다네”
선아: 아하~ “장자는 혜자의 재상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데 혜자는 양나라 벼슬을 움켜쥐고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장자를 놀라게 했다”는 말이군요. 장자는 원추이고 혜자는 썩은 쥐를 잡고 놓치지 않으려는 올빼미라고 비유했군요.
채하: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바로 박제가의 어락도(魚樂圖)에 나오는 글이다.
“장자: 피라미가 조용히 놀고 있군.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야. 혜자: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물고기가 즐겁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장자: 자네는 내가 아닌데,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혜자: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래 자네를 몰라. 자네도 본래 물고기가 아니라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없어. 장자: 부디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나에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은 것은 이미 내가 그것을 안다고 믿고 나에게 질문 한 것이지, 그렇지 않나?. 나는 그것을 이 물가에서 알았다네”

선아: 장자는 이 글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죠?
채하: “형식적 논리로는 진리를 알 수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즉 “우리는 관찰의 경험과 순수한 직관으로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상대를 경험과 느낌으로 아는데 속이 좁고 의심이 많은 사람은 구구하게 따지느라 이러한 인식능력을 상실한다. 또는 이득을 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진실을 외면하다가 진실을 잊기도 한다.
선아: 앎에 대해 성찰하라는 말이군요. 타자의 삶의 태도를 알면서도 하찮은 권력과 지위를 얻거나 지키려고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이야기이군요. 그 점을 성찰한 후에 다시 세상을 직시하라는 뜻이군요.
채하: 장자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장자는 지식과 지혜로 만들어지는 문명이 싫었는데 극단적 입장을 취했다. 자연 본래의 이치를 따르지 않는 일종의 ‘문명거부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문명의 기록인 학문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학문을 하기 시작하면 점점 성품이 좁아지고 자연의 도와 점점 멀어질 수 있으니 아예 책을 잃지 말자”까지 말했다.
선아: 그러면 장자는 서양철학자인 토마스 홉스라 존 로크처럼 문명 이전의 상태인 ‘자연 상태’로 회귀하자고 했나요?
채하: 그렇지 않다. 장자의 우려는 학문이나 문명 그 자체가 아니었다. ‘인습과 욕망에 얽매여 사는 어리석음’, ‘물고기를 관조할 경우에 얻는 내면적 희열에 대한 무지’, ‘사소한 이익에 얽매여 세상에 흐르는 커다란 이치를 직시하지 못하는 다시 말해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급급하고 분주한 삶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자 했다.
선아: 조선과 중국의 유학자들이 유가와 대립하지만 장자를 필독서로 여긴 까닭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어요. 장자의 사상은 문명사회가 지속되는 한 결코 중심 사상이 될 수 없지만 세상과 학문을 대하는 자세를 성찰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채하: 박제가가 노장취향의 실학자라서 이 문장을 삽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겠지? 하여튼 여러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을 했는데 정몽주는 “물고기는 당연하게 내가 아니고 나는 물고기가 아니니, 사물의 이치가 서로 달라 다르다. 장자의 호숫가 이야기가 지금껏 천년이 지나도록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군”이라고 하였다. 이이는 “대상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으면, 물고기가 아니라도 물고기를 안다”고 말해 성리학적 입장으로 장자를 옹호했다. 이 이외에도 여러 학자들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깨닫는 장자의 직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선아: 박제가는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실학자라고 한국사 수업에서 배웠습니다. “그는 관념보다 실상을 중시했고 모든 일의 실질적인 기능을 살펴 현실에 적응되는 지식을 추구했다. 이러한 배움을 위해 가장 중요한 태도는 선입견을 지우고 세상을 직시하며 인식하는 일이다. 과거의 시문들은 과거에 적합한 지식으로 지금의 상황에 적합하지 않으니 자연(변화된 환경)에서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 한마디로 실사구시를 주장했다고 합니다.
채하: 박제가의 그 같은 주장은 장자의 견해와 닮았다. 관습으로부터 자유롭게 세상을 인식해야 하며 그것을 직시함으로써 인간은 성숙해진다고 보았다. 장자의 추수(秋水)편에 실린 원문과 박제가의 ‘어락도’에 실린 인용문을 보면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박제가의 그림에는 “지지이문아, 아지지호상야(知之而問我, 我知之濠上也)”라고 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지아지지문아, 아지지호상야(知我知之問我 我知之濠上也)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두 글의 뜻은 같다. 박제가가 그 의미는 같은데 글자 수를 줄였을 뿐이다. 그보다는 박제가와 장자의 차이점을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선아: 두 대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채하: 박제가는 <고기잡이>라는 글에서 물고기들의 타자에 대한 배려와 공존하는 태도를 말한다. 즉 사람에게 식용인 물고기들이 오히려 뭍에 사는 사람을 보고 걱정하는 모습을 말한다. 장자는 물속에서 노는 물고기의 즐거움에 대해 인간이 그 상황을 관조하므로 즐겁다고 말함으로써 물고기를 단지 즐거움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박제가는 즐거움의 근원에는 물고기의 인간(타자)에 대한 배려가 담고 있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강조했다. 이런 까닭에 박제가는 어락도를 그릴 때에 물고기의 비늘 하나하나까지 그렸다. 또한 동양회화사 전통에서 박제가가 아니라도 어락도는 자주 그려지던 그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다른 의미가 있다.
선아: 다른 의미라니요?
채하: 박제가는 단순하게 어락도를 그린 것이 아니다. 어락도의 주제를 물고기의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과 그 즐거움을 안다고 하는 차이는 무척 크다. 박제가가 그린 이 그림의 주제는 후자 쪽에 가깝다. 장자의 세계관을 물고기의 즐거움이라고 하면 박제가는 그 지점을 넘어 문명을 올바로 문명화시키기 위한 인식지평의 확장을 보여준다.
선아: 인간과 물고기의 공존, 물고기가 오히려 인간의 삶을 걱정하는 태도에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그 점에서 박제가가 쓴 <고기잡이 노래>라는 글이 가슴 깊이 남습니다. 그 원문을 듣고 싶습니다.
채하: 오늘 강의는 그 원문으로 대신하며 마치기로 하자. “물고기들이 물에서 나와 아가미와 등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은 가끔씩 내가 세수하고 목욕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러니 물의 입장에서 물고기를 보면 어떻게 자신이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또한 물고기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면 의지할 데가 없어 곧 죽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박제원(전주완산고등학교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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