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무장현감 남편에게 두부장을 보내다
고창 무장현감 남편에게 두부장을 보내다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9.05.0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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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여강이씨가 장류 보내면 쓴 한글 서간문…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민간음식 고문헌 심포지엄서 발표

서방님 입맛 잃으실까 고추장·즙장·두부장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고을(에 돈이) 바싹 말랐으니 어찌하겠삽? 절통하옵. 장(醬)을 보내라 하오니, 된장 말인지… 끓여나 잡수실까, 된장이 나을 듯하여 한 항아리, 고추장과 두부장도 한 항아리씩 가옵.' 
1847년 6월 경상도 안동의 아내는 멀리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현감으로 간 남편이 걱정돼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객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아내가 생각한 해결책은 '장'이었다.

학봉 김성일의 10대 종손 김진화(金鎭華, 1793~1850)의 부인 여강이씨(驪江李氏, 1792~1862)가 무장(茂長)에 현감으로 가 있던 남편에게 보낸 한글 편지 16통(한국학중앙연구원소장)에 이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이는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 '한식 세계화를 위한 조선시대 민간 음식 고문헌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안동의 아내가 전라도 남편에게 보낸 장류'에서다.

55세의 아내가 한 살 연하 남편의 건강을 애틋하게 챙기는 이 편지에서 이씨는 아예 고추장·된장·두부장·즙장·초장 등 장류를 항아리째로 남편에게 보내 입맛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김진화는 1846년 4월 2일에 무장현으로 발령이 났다. 1847년 6월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여강이씨의 편지엔 된장, 고추장, 초장을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하인으로 있던 춘근이와 부전이가 안동으로 보내는 물품을 빼 먹은 사건이 발생했기에 여강이씨는 여간 속이 상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보낸 편지에선 '반찬도 고추장도 못 보내니 답답하옵'이라고 적은 뒤 추신을 통해 '고추장 조그마한 한 항아리 보내옵'이라고 썼다.
고추장 못 보낸다고 썼지만 마음이 께름칙해 작은 단지에라도 담아 보내야겠다고 생각해서 하인을 불렀던 것이다.두부장은 고추장·간장의 맛이 두부에 삼투압돼 입맛이 없을 때 좋은 장류이며, 고추장은 영조 임금이 입맛을 되살려주는 약으로 즐겨 먹었다고 했다. 여강이씨가 살았던 시절 두부장은 음력 3월에 담그는 장류의 하나였다.영조는 '가을보리밥에 고추장과 김칫국이 거의 입맛에 맞았다'고 할 정도였다. 서울의 순창조씨 조종부(趙宗溥. 1715-?) 집의 것이었다. 물론 순창의 것은 아니었지만 그 유명세 때문에 보낸 것은 아니었을까.

1847년 11월 14일에 여강이씨가 또, 김진화에게 편지와 김장김치를 보냈다. 사실 이날 편지에서는 김진화가 복통과 설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가득하게 적었다. '곰탕이나 해서 조금 들고 양즙(眻汁)이라도 아침 저녁으로 해 먹으면서 기운을 붙드소서. 그저 있다가 기운이 모조리 없어진 뒤에는 어찌 하오리까' 그러면서 김치를 보낸다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안동 집에서 이미 김장을 했고 그 김장김치를 보내는 것이라 여겨진다. 또 김진화에게 육장(肉醬)을 담아서 김치 항아리에 넣어 보내라고 요청을 했다. 조선시대 쇠고기는 일반 사가에세보다 관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우금(牛禁)이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남편 없는 여강이씨가 이를 구하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전라관찰사를 낸 서유구는 '임원경제지. 정조지(鼎俎志)'에서 '육장은 우육을 청장에 끓이다가 장이 절반쯤 졸았을 때 천초, 생강을 넣어서 오지항아리에 저장한다'고 했다. 1848년 9월의 편지에서는 '자잘히 마냥 괴로우시고, 새로이 음식을 못 잡수시고 잠 못 자신다 하오니 답답하옵'이라며 '저번에 간 즙장은 맛이 좋지 못하오니 급급(하옵). 즙장을 묻고서 이내 비가 와 거름이 식어서 그리 되오니… 즙장 메주 조금 남은 것 보내옵'이라고 썼다. 
실패를 겪어 가며 여름에 먹기 위해 만드는 급속 된장인 즙장을 보내는 사연이 절절하다. 아내는 또 김치를 항아리째 보내는가 하면, 굴젓·문어·방어·생광어·통대구젓 등 어물류도 보낸다. 안동이 내륙 지방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고군분투였던 셈이다. 
그러나 입맛과 풍속 차이로 고생하는 한편으로 현지의 첩에게서 얻은 딸 문제로 아내와 다투던 남편은 정작 4년 만인 1850년 1월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그 뒤 12년을 더 살았다. 
부인 여강이씨가 남편 김진화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14편은 모두 김진화가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쓴 것이며, 또 다른 1편은 아버지와 함께 무장현에 있던 장남 김흥락(金興洛, 1827-1899)에게 보낸 편지도 있다. 
양반 관료의 부임지와 고향 사이에 식료와 음식의 교환이 이루어진 부분이 이같은 간찰 자료에 나온다. 음식의 기본 맛을 좌우하는 장류의 교환은 타지에 가 있는 남편의 건강과 입맛을 챙기는 부인의 애틋한 사랑이 담겨있기도 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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