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시간 기다린 커피 한 잔
5시간 기다린 커피 한 잔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5.1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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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뒤적거려 흥미로운 몇 가지 사례들을 찾아보았다. 이미 지난 일인지라 재미는 있지만 현실에서 대하기에는 선뜻 동의가 어렵다. 2007년 1월 21일, 서울 남대문로 한국은행 앞이다. 긴 줄의 사람들이 혹한을 무릅쓰고 비닐과 담요로 몸을 감은 채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새로 발행되는 1만원권 신권을 바꾸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 무렵 새로운 우표가 나오는 날이면 우체국 앞에서 밤을 새는 수많은 사람들의 후손 쯤 돼 보인다.
2016년 7월, 한여름 무더위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사진을 이룬 그들의 후예들이 있다. 서울 강남대로에 미국 프리미엄 버거 브랜드 '쉐이크쉑' 1호점이 개점하는 날이었다. 2017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기념하는 ‘롱패딩’ 세일 앞에 줄서기 대란이 일어났다. 한정판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침낭을 챙겨 들고 매장 앞에서 밤샘 노숙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해 10월 28일 서초 센트럴아이파크 견본 주택 앞에 수많은 텐트가 쳐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미분양 아파트에 대한 선착순 계약을 앞두고 2~3일 전부터 만들어진 줄서기였다.

우리에게 줄서기는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니다. 맛집 음식 한번 맛보고자 1~2시간쯤 줄을 서는 것은 차라리 애교 수준이다. 두 세시간 기다려서야 냉면 한 그릇 먹고 뿌듯해 하는 매니아들을 보고 혀를 찰 일이 아니다.
지난 4일, 뉴스 한 켠에서는 서울 성수동에 들어선 커피 브랜드점인 ‘블루보틀’ 앞 풍경을 전했다. 오후 1시에 1호점 개점을 알리며 문을 열었지만 길게 늘어 선 줄은 이미 전날 밤중인 0시부터 시작되었다. 커피 한잔 맛 보려고 5시간이나, 그것도 밤을 새며 기다린 셈이다. 첫 날 풍경만 보면 ‘스타벅스’나 국내 커피점들이 커피계의 풍운아 ‘블루보틀’의 등장에 긴장할 만 하다.
이런 무모할 만한(?) 줄서기를 두고 ‘과시를 위한 가짜 행복 경쟁’ 이니 ‘허영·허세의 방증’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개인의 '취향'과 '선택'의 문제라는 반론에는 딱히 제기할 이의는 없다. 이런 현상을 두고 이런저런 주장도 많지만 구민정 교수의 ‘사회적 비교'와 ‘사회적 인증’이라는 설명이 주목을 끈다. 즉 이런 줄서기 현상은 “비교 우위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분위기가 강한 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아시아인들은 상호 의존적 자아 (interdependent self)가 강한 편이어서 타인이 하는 것을 따라 하는 심리가 강해 경쟁적으로 줄서기도 상대적으로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닐 테다. 나의 경우 5시간이나 기다려 커피 한 잔 마시는 희열을 느끼는 ‘가치 소비자’가 아니라 조금 한가해지면 여유롭게 마시려는 ‘필요 소비자’다. 커피를 시켜놓고 5시간 동안 오지 않은 그녀를 기다려 본적은 있어도 5시간을 기다려 마침내 커피를 마셔 본 적은 없다. 이쯤이면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세대를 이해하는 가늠자이고 세태를 읽어내는 화두가 된다. “줄 서기는 자기 순서를 알고 기다리는 것, 즉 사회 계약을 이해하고 준수한다는 전제가 깔린 행위다”. 한 밤을 뜬 눈으로 지새며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가치 소비자’들에게 최재천 교수의 말로 축하를 전한다.
/권영동(객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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