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의고장,김제이야기](41)장명등(長明燈)의 교교한 불빛, 선비 이계맹을 비추다
[지평선의고장,김제이야기](41)장명등(長明燈)의 교교한 불빛, 선비 이계맹을 비추다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5.1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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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유형문화재 제78호 재궁리 석등은 김제시 제월동 재궁마을에 소재하며 조선중기 문신 이계맹과 부인 최씨 묘소 앞에 부설되어 있다. 석등은 불상 · 탑파 등과 함께 불교로부터 그 연원을 두는 불교 조형미술품의 대표격으로 그 중 등구인 석등은 어둠을 밝혀주는 부처의 진리를 상징하며 지혜 ․ 해탈 ․ 자비 ․ 선행 ․ 재생 등을 의미한다. 
불교국가 내에서도 우리나라는 중국 ․ 일본 ․ 인도 등에 비해 월등히 석등의 잔존 수가 많은데 약 280기의 석등이 존재하며 그 중 완형은 약 60기 정도이다. 재궁리 석등은 그런 불교적 상징물이 능묘 앞에 설치하는 기념물로 분화 설치된 사례로 장명등(長明燈)이라 일컬어지며 고려시대부터 분묘의 장엄으로 등장한 사례로 조선 중기의 석등 양식의 중요 자료이다.  

장명등의 주인 이계맹과 관련해서 두 개의 역사 일화, 종계변무와 무오 · 기묘사화를 반추해보자. 종계변무(宗系辨誣). 이 생경한 단어는 명 기록인 『대명회전』에 ‘조선 태조 이성계가 이인임의 자손이며 고려의 왕, 4명을 시해했다’고 기록된 ‘종계(宗系 : 종가의 혈통)의 오기’를 바로 잡기 위한 200년간의 조선의 노력을 통칭한다. 
이계맹은 1518년(중종 13) 주청사로 명에 다녀와 『대명회전』 에 종계 오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1394년(태조 3) 종계 오기를 인지하고 변무(辨誣 : 왜곡을 바로잡음) 요청이 오고 간지 124년이 경과된 시점이었다. 이후에도 71년이 흐른 뒤에야 종계오기는 수정된다. 그 국가간 기록물 정쟁의 와중에 이계맹이 있었다. 
또 하나 일화로 이계맹은 조선 4대 사화 중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 1519년(중종 14)의 기묘사화에 연관된다. 사화는 ‘사림(士林)의 화’의 준말로 ‘조선 중기 신진사류(新進士類) 곧 사림이 훈신 · 척신들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을 통칭한다. 무오사화는 1498년 『성종실록』 편찬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 : 의제를 애도한 글)」이 빌미가 되었는데, 진나라 때 항우가 초나라 의제를 폐한 것을 애도한 글이나,  이를 세조가 단종을 폐위 사사한 사건을 풍자한 글로 훈신들에 의해 확대해석되면서 사림에 대한 참혹한 박해를 빚어낸 사건을 말한다. 
이 때 이계맹은 김종직의 문인이라 분류되어 곤장형과 귀양에 처해지나 곧 김종직의 문도가 아님이 밝혀져 풀려난다. 또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 개혁사림 조광조 등이 버거웠던 중종의 심리를 이용하여 훈구파가 이른바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는 趙의 破字) 사건을 만들어 개혁사림을 숙청한 사건을 말한다. 
고향 김제로 낙향하였다가 사화 이후 좌찬성으로 조정에 복귀한 이계맹은 정치적 친소 및 이해득실과 무관하게 ‘사림에게 화를 얽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개혁사림을 구제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비’란 명칭은 범용으로 사용되었으나 본디는 유교국가인 조선의 여망이 반영된 ‘유교이념을 구현하는 인격체’를 뜻한다. 그렇게 남겨진 이계맹의 족적을 묘소 앞 장명등이 오늘도 비추고 있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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