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의고장,김제이야기](48)김제 백구면 부용역이야기
[지평선의고장,김제이야기](48)김제 백구면 부용역이야기
  • 새전북 신문
  • 승인 2019.07.04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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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백구면 월봉리 소재 부용역(芙蓉驛)은 호남선 익산역과 김제역의 사이에 위치한다. 부용이란 이름은 당초 마을에서 역명이 정착된 사례로 1914년 1월 1일 영업을 개시하였다. 현 역사는 1958년 준공하였다고 하며 2008년 1월 1일부터 여객의 감소로 인해 역무실을 폐쇄하였고, 모든 여객 열차가 무정차하고 있다. 
부용역에서 동쪽방향으로 뻗은 약 400m의 직선 중앙도로의 좌우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제법 위계있는 건물들과 성업하였을 상점들이 즐비하고 건물들 중 상당수가 일제가옥의 형태를 띠고 있다. 1970 ~ 80년대 점포문의 대명사인 상방과 하방사이 함석문 ․ 나무문을 연이어 끼워 맨 마지막 문을 잠그는 널문 형식 등이 여전히 고스란히 살아있었다. 

부용역은 김제역과 함께 일제강점기 김제만경 호남평야 쌀 수탈 거점 중 하나였고, 해방 후 농촌이 고도성장기의 도시를 떠받치는 기반으로 작동하던 1980년대 중반까지 내내 풍요가 집중되던 농촌 거점이었다. 그래서 이 곳 부용역은 쌀을 중심으로 한 화물과 인근 이리(현 익산)로 가는 통학통근행렬이 몰리어 그야말로 북새를 연출하였다고 한다. 
객차가 약 9 ~ 10량 정도였는데 워낙 출퇴근 등하교의 수요가 많아서 그야말로 객차는 콩나물시루였다고 한다. 사람 사이에 사람을 틈 없이 밀어 넣어야 통학통근이 가능했다고 하니, 다른 구술자가 말하는 ‘남성고 칸, 이리고 칸, 이리상고 칸, 이리공고 칸, 여학생 칸’ 등의 객차 칸의 분화는 그나마 통학통근 폭발이 다소 해소된 문명화된 상황이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은 2018년 11월 김제시청 청원교육의 일환으로 김제 벽골제와 김제 전역 일제수탈사를 다룬 <아리랑을 걷다>를 진행하였다. 사업 진행시 부용역 소재지와 부용 거주자의 근대기억을 한 꼭지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올해 초 부용거주자인 최경식선생을 소개받았다. 앞선 통학통근열차에 대한 기술 또한 최경식선생의 경험을 적은 것이다. 1935년생인 최경식선생은 부용초등학교-이리중학교-이리상고-이리공대를 다니고 백구금융조합에 입사해 농협직원으로 퇴직한 분이다. 중앙도로 400m를 답사하며 최경식선생이 재구성한 부용은 지서, 소방서, 우체국 등 기관과 이발관, 사진관, 양조장, 주단집, 잡화점, 철물점, 약국, 그리고 여관과 수십 개의 술집 등, 편의시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또한 부용역의 위세에 맞추어 오일장이 섰다고 하는데 우시장과 가마니장이 섰으며 우시장에서는 종종 소싸움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답사 시 각 상점의 상호를 물으면 최경식선생은 대부분의 상호를 ‘부용’이라고 답하며 “어디서든 이 안에만 들어오면 다 부용이다”라고 하셨다. 부용이란 이름은 실제 면소재지 이름인 백구보다 더 강한 귀속성으로 작동한 것 같다. 
이채롭게도 걸어서 13분 거리의 통싯골 인근 도로변에서 헤어샵, 가든, 할인마트, 당구장, 노래방, 건강원, 호프통닭집까지 상호가 다 ‘부용’으로 채워진 구역을 만났다. 마치 최경식선생이 말씀하셨던 바대로 “이 안에만 들어오면 다 부용이다”가 그 곳에 있었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학예연구사 정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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