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잘 할 수 있겠어?” 아직도 사회에 남아있는 고정관념이 이렇다. 능력이 아닌 성별에 대한 평가는 여성의 사회 진출에 발목을 잡는다. 이른바 ‘주요 보직’을 향하는 여성에게는 더욱 가혹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장벽을 이루고 있는 분야도 만연하다. 하지만 이런 불모지 개척을 위한 여성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두터운 유리 천장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최근 또 하나의 불모지를 개척한 이가 있다. ‘9급 출신 최초 여성 지방병무청장’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 이영희(57) 전북지방병무청장이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 주
△차별 없는 세상 위한 도전
성공을 목표로 달려온 소녀는 공무원이란 길 앞에서 꿈을 키웠다. 성별, 출신 등 제약 없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차별 없이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져온 책 읽기와 글쓰기 습관이 없었다면 진즉 책상에서 도망쳤을지 모를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평생 할 공부 다 했다 싶었을 때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을 무렵이었다.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하고 받아 든 통지서에는 ‘합격’이란 글씨가 선명했다. 1980년 만 19살의 나이였다.
사령장을 받기 전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는 설렘과 발령 근무지에 대한 생각으로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한 참을 애태우던 운명의 수레바퀴는 경기도지방병무청 앞에서 멈춰 섰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길에 놓여 당황스럽기도 했다.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수차례 되물었던 것 같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이것도 운명이거니 묵묵히 걸어가기를 선택했다.
△“여자가 병무청에서 근무해요?”
초임 발령 시기 주요 임무는 민원상담이었다. 시험 준비로 끝날 줄 알았던 공부는 생소한 병무행정용어와 업무 등으로 연장선에 놓이게 됐다. “병역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부분이잖아요, 실수 안 하려고 정말 노력 많이 했어요” 새내기 공무원의 열정은 오늘날 ‘행정 전문가’라는 수식어를 선물했다.
그렇게 열심히만 하면 성공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꿈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직원은 없어요?” 민원인들의 물음은 열정 하나로 달려온 그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예전에는 병무청에 여직원이 근무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민원인이 많았어요. 초임 때는 민원상담 끝에는 ‘여자가 병무청에서 근무해요?’라는 질문도 많이 받았죠”
지금은 상황이 나아졌지만 당시 병무청 행정직 여성 공무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이 탓인지는 몰라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유리천장도 여러 번 느껴야 했다. 누군가에는 상처로 남을 수 있는 기억이지만, 그에게는 커다란 성장 동력이 되어준 계기기도 했다. “그때부터 여성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지기로 했어요. 그저 병무청 직원으로서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 하기로 했죠. 나와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에 게으름 피우지 않고 달려왔던 것 같아요”
노력의 결과는 승진으로 이어졌다. 본청 병역공개과장, 현역모집과장 등 주요 보직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한 단계, 한 단계 씩 성장했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왔다. 오늘날 ‘병무청 유리천장을 깬 첫 여성’이란 타이틀을 얻게 해준 결과이기도 하다.
△전북에서 새롭게 꽃 피울 ‘공정병역’의 꿈
승진자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기쁨 보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앞섰다. 전북지방병무청장으로 발령이 확정됐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사명감을 느꼈다. 전북지역에서 하는 첫 활동이다 보니 하고 싶은 것도, 해내야 할 것도 많다고 생각해서다. “전북의 병무행정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어요. 보다 나은 병무서비스 제공을 위해 늘 고민하고 있죠” 새로운 목표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조직 내 소통 확대다.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소통이 우선 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전북병무청 내 ‘소통창구’는 존재하지만, 그는 직원들의 근무환경으로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소통함이 있다 해도 잘 이용하려고 안 해요. 직원들 불러 놓고 ‘고민 얘기해봐’하면 누가 답하겠어요. 일적인 칭찬을 건네면서 안부를 묻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더라고요”
조직 안정과 생산적인 근무환경 변화를 통해 그가 이루고 싶은 것은 ‘병역의무자만을 위한 병무행정 개선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혁신’이다. 법?제도와 현장간의 충돌로 야기되는 문제를 찾기 위해서도 직접 현장에 뛰어들 각오가 돼있다.
병역분야에서 보여줄 수 있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위해서는 임기 동안 ‘공정병역’을 강조할 계획이다. 법과 원칙에 따라 복무관리를 하되, 사회복무요원?산업기능요원 등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권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뒤쳐지지 않게 노력했고, 어느 조직보다 공정하길 바랐던 경험이 없었다면 생각지 못한 비전일 수도 있다.
엄마의 마음으로 수십만의 장병을 마주해왔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았다.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이들을 위해 노력하겠다 선언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병역은 대한민국 청년들의 걸림돌이 아닌 인생 전환점을 선물해주는 계기가 돼야한다고 생각해요. 이를 위해서라도 병역은 어떠한 의혹이나 부정적 요인이 개입되면 안돼요. 청년들이 사회로부터 존중받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남은 공직 생활을 받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