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락달그락]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 고스란히
[달그락달그락]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 고스란히
  • 이진영, 박승민 청소년기자
  • 승인 2019.08.07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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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청소년,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② 군산 문화재 야행길을 걸으면

군산을 찾는 연간 관광객의 수가 2018년 500만을 돌파 했다. 1900년대 개항초기 일본 등의 다양한 외국 문물들이 군산항을 통해 유입되면서 군산은 다양한 역사, 문화 공간이 존재한다. 관련해서 홍보와 안내자료는 많지만 그곳에 깃들여있는 역사적 의미와 군산시민들의 정신을 들여다보기는 쉽지 않다. 특히 역사교과서에는 분량이 적은 군산 나아가 대한민국의 근대역사에 대해 청소년들이 접근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에 청소년 기자단이 그 장소를 찾아가보고 인터뷰를 진행하여 ‘청소년이 바라 본 군산의 역사와 문화’를 연중 기획연재 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2일부터 4일까지 1차와 16일 부터 18일까지 2차로 나눠서 근대역사박물관 및 일원에서 군산 야행을 진행하고 있다. 군산시에서 주최를 하고 문화재청과 전라북도에서 후원을 하고있다. 행사는 테마형식으로 야경-밤에 비춰보는 아름다운 문화 유산, 야로-밤에 걷는 문화 유산의 빛의 거리, 야사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역사, 야화-한 여름밤에 보는 문화유산의 정취, 야숙-군산 역사이야기 속 하룻밤, 야식-밤에 즐기는 맛의 거리, 야설-밤에 펼쳐지는 문화공연, 야시-근대역사가 살아있는 문화장터, 로 진행이 된다. 군산 야행은 군산의 문화재를 여러 컨텐츠와 융합해 흥미롭게 알리고,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시작했다.
군산세관을 시작으로 10곳의 스탬프 투어로 이루어진 곳들은 관광객들과 군산시민들의 흥미를 끈다. 군산시간여행마을로 가보았다. 세관에서 맞이하는 문화해설사는 평소에는 요청이 있을 때 하게 되는데 행사 주간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있어 기쁘다며 해설을 시작한다.

군산항·군산세관의 이야기

“120년전 1899년 5월1일 고종 황제의 명에 의해 군산항이 개항이 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산세관이 건설 되었다. 군산세관 건물은 1908년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지어졌다. 건물은 한 독일 사람이 설계를 했고, 붉은 벽돌 같은 자재는 벨기에에서 수입을 했다는 설이 있다. 주요특징은 창문인데, 왼쪽 창문은 아치형, 오른쪽 창문은 직사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다 대칭을 이루고 있다. 2층을 보면 뾰족한 첨탑같이 생긴 것이 3개 있는데 이를 고딕 양식이라 하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1908년부터 1993년도 까지 실제 세관 업무를 하던 곳이다. 세관업무는 수출, 수입 물품에 대해 통괄하고 관세를 부여하게 하는 역할과 밀수품 적발을 주 업무로 삼았다. 세관에서 일제강점기 때 쌀을 수탈하는 전진기지의 창구 역할을 했는데 주로 김제,호남,만경 평야에서 재배한 쌀을 기차로 군산항 까지 오면 군산항에서 다시 배에 싣고 일본으로 보냈었다. 이 때 쌀을 옮긴 이들은 조선인들이다. 1926년도에 축항공사를 기념 하기 위해 쌀탑을 쌓은 사진들에서 보이는 세관원들이 입은 복장 즉 관복인데 세관원들은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밀수품 수입한다면 현장에서 즉시 체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앞에 쌓인 쌀의 탑을 보면 그 당시 수탈의 상황을 알 수 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이야기

1910년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1911년 8월 「조선은행법」이 공포되었고,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으로 개칭되었다. 1920년대에 우리나라 전체 10여개의 조선은행이 있었고 그중 군산에 7개 이상의 조선은행이 있었다. 그 당시의 화폐가치로는 1만원이 지금의 800만원이다. 그때 당시 자본금이 6만원, 현 시세로는 4천 8백만원의 조선은행과 일본 제 18은행(이하 18은행)이 생겼다. 그런데 조선인이 세운 은행의 규모는 1만원 자본의 규모의 가지고 만들졌었다. 심지어 18은행은 나가사키가 본점이며 수탈의 목적을 드러내는 설립이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이 세운 은행은 보존되지 못하고 제국주의 금융기관인 조선은행이 경제권을 장악했다.
조선은행은 지금으로 치면 한국은행이 했던 역할을 했었고 18은행은 서민 특히 일본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결국에는 조선은행도 똑같이 일본인들을 위한 은행이 되어버렸다.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높은 이자와 고리로 돈을 빌려주고 담보도 잡아놓고, 그런데 일본사람들에게는 저리로 빌려주었다. 그러다보니 개항이 돼서 일본사람들이 몰려오는데 특히 못 사는 사람들이 와서 은행에서 도와주니까 점점 토지를 넓혀가고 농장주가 되고 그러다보니 군산에 일본인 명의의 농장이 많다. 그리고 채만식의 소설 ‘탁류’를 보면 조태수가 나오는데 그의 직업적 배경이 조선은행이다. 작품 중 조태수는 성실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횡령하며 일을 했다고 묘사된다. 실제로도 당시에 조선은행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 발생했다고 한다.
철길을 통해 호남지역에 쌀을 가져와서 다시 배로 일본으로 보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쌀을 보내는 일 뿐만 아니라 그들만의 단체를 만들어서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옥구항진 같은 독립운동이다.
신흥동일본식가옥

 부협의회 의원이며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주택으로 신흥동 일대는 일제 강점기 군산시내 유지들이 거주하던 부유층 거주 지역이었다. 이 가옥을 보면 그때 당시의 부유층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거주하기 위해 했던 일과 부유층 문화를 알 수 있다.
창문 곁으로 보면 둥근창과 온돌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층은 온돌방이고 2층은 다다미 방이다. 이 집은 1935년도에 지어진 집이다. 일본사람들이 거주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온돌문화를 처음부터 반영해 지은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가옥 안에는 석탑도 있고, 석굴도 있다. 이것은 당시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문화재를 집안으로 가지고와서 자신의 것처럼 풍류를 즐겼던 것을 알 수 있다.일부는 일본으로 유출 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다음 기획에서는 문화재 야행 2차 길을 따라 시간여행마을의 이야기를 보도한다./이진영, 박승민 청소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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