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칠성
양칠성
  • 이종근 기자
  • 승인 2019.08.12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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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청년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바다를 건넜다. 인도네시아 자바에 주둔한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다. 인도네시아 여성과 결혼해 아이도 낳았다. 조선은 1945년 해방을 맞았지만 청년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가담해 싸우다 잡혀 1949년 총살됐다. 그러나 26년 뒤 그는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인정받아 자바의 국립영웅묘지에 묻혔다. 그의 이름은 양칠성(梁七星)이다.
인도네시아에 처음으로 한국인 이름이 붙은 도로가 생긴다고 한다. 대개 낯설거나, 누구에겐 애처로운, 아무에겐 껄끄러운 이름, ‘양칠성’이다. 그는 연합군 포로를 감시했던 일본군 군속 출신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선 외국인 독립 영웅이다. 인도네시아 서부자바 가루트(garut) 지역에 양칠성로(Jalan YANG CHIL-SUNG)가 조성된다고 한다. 주요 도로 명칭은 수카르노(국부) 하타(초대 총리) 수디르만(초대 군 최고사령관) 등 주로 독립 영웅에게 허락된다.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사람 이름을 딴 도로는 특별하다.

양칠성은 1919년 5월 29일 완주군 삼례에서 출생했다. 1942년 일본 남방군에 징용으로 끌려가 1945년까지 자바섬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했다. 양씨는 종전에도 불구하고 귀국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았다가 네덜란드의 재(再)식민지화정책에 맞서 싸우던 현지 독립군에 가담해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그는 1948년 11월 부대원들과 함께 가톳 부근 가룽우아라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모의하던 중 네덜란드군에 체포돼 이듬해인 1949년 8월 크르콥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됐다.
양칠성이 죽은 후 인도네시아는 독립에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이끌던 독립군 부하들이 진급하면서 국립묘지에 묻혔다. 양칠성 묘비에는 '야마다와 시치세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적혀있었다. 그의 공적은 숨진 지 26년 만인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군(TNI) 고위 장성이 된 옛 독립운동 동료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공개됐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공인했다. 1995년이 되어서야 그는 국적과 한글 이름을 되찾고, 묘비도 걸맞게 바꿨다. 현재 자카르타의 칼리바타 국립묘지에 안장돼 있다. 양칠성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인도네시아 학교 교과서엔 '우리나라 독립을 도와준 고마운 한국인'이라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일본인으로 기억하는 인도네시아인이 많다. ‘골수 친일’에다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쳤다는 등 달갑지 않은, 아니 외면하고픈 연구 결과들이 존재한다. 3ㆍ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행사가 최근 다채롭게 열리고 있지만, 양칠성의 들어갈 자리는 없다. 올해는 양칠성이 태어난 지 100년, 숨진 지 70년 되는 해다.
/이종근(문화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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