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또 저문다. 그러나 동지가 막 지났으니, 벌써 하루하루 낮이 밤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한 편으로는 또 새로운 내일의 2020년이 열려가고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달 달력을 보니, 지나온 12달 동안 우리는 무엇을 하였나 되돌아보게 된다. 한 해 동안 필자는 학교 수업이 없는 날엔 주로 시골 마을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다. 연말이면 그 결과로 3권의 ‘마을지(village ethnography)’가 나올 예정이다.
올해는 필자가 60년대 후반에 시골을 떠나 전주에 산 지 올해로 만 50년이 된 해이다. 50년 동안 필자가 한 일들은 주로 필자의 소위 ‘전공’이란 것에 얽매여 ‘전공’에 관련된 것들만을 찾아 세상을 떠돈 나날들이었다.
올해엔 그런 필자의 삶과 많이 다른 한 해를 보내었다. 시골의 오래 된 ‘전통마을’들을 찾아 다니며 그 마을이 수백 년 혹은 천 여 년 이상을 가꾸고 온축해온 그 마을의 수많은 다양한 문화적 실체들, 곧 ‘전통 마을문화아카이브’ 정리에 한 해를 매진한 셈이다.
이런 작업에는 이른바 ‘전공’의 좁다란 통로로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전공’이란 눈으로 보면 그런 전통 마을문화아카이브의 몇 십 분지 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 마을의 문화는 적어도 자연인문화경 · 동식물 · 풍수지리 · 역사 · 조직 및 회의 · 지명 · 주민구성 · 방언 · 생업 · 식생활 · 의생활 · 주거생활 · 통과의례 · 사회생활 · 각종도구들 · 세시풍속 · 마을축제 · 놀이 · 민속신앙 · 종교생활 · 의료생활 · 교육 · 서적 및 문서들 · 유물 및 유적들 · 예술 · 속담 및 숙어 · 민요 · 신화전설민담 · 기념물 등등, 수많은 복잡한 문화아카이브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런 수백 혹은 천 여 년 이상을 우리 민족이 전국의 그 많은 마을들별로 축적해온 그 다양한 마을문화아카이브들을 그대로 방치한 채 돌아보지 않았다. 이런 우리의 마을문화아카이브는 이른바 여러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압축근현대화’ 과정에서 이제는 거의 아사 직전에 놓여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우리 문화의 전국적인 위기를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는 그 다양한 마을문화들을 그저 우두커니 지켜만 보고 있다.
하루에도 수많은 종류의 동식물의 종이 사라지고 있는 자연환경의 위험 못지않게, 우리나라 전국의 그 다양했던 전통 마을문화아카이브들이 사라지는 것 또한 문화적으로는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문화정보제국주의에로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또한, 21세기가 이른바 ‘문화다양성’을 중시하는 시대임을 우리는 늘 경험하고 깨닫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문화다양성‘의 보고인 우리의 소중한 전통 마을문화아카이브에는 별다른 총체적인 관심이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깝다.
한 해를 보내며, 그래도 올 한 해 허락된 시간 동안이나마 시골에서 우리 전통 마을문화아카이브들의 조사 · 정리 작업에 골몰한 시간들이 행복하다. 이런 작지만 가장 기초가 되는 문화적 기반화 작업들이, 새해엔 더욱 더 활발하게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