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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임실 봉화산, 반파국 봉화대

전북 동부지역, 우리나라에서 봉화산 가장 많음
고고학으로 밝혀낸 임실 봉화산, 반파국 봉화대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09월 27일 13시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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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은 통신망의 전봇대와 그 역할이 거의 똑같다. 하나의 봉화산이 존재할 수 없으며 반드시 봉화로가 복원돼야 한다. 2014년 반파국 봉화대로 밝혀진 남원 봉화산은 운봉봉화로가 통과한다. 무주 봉화산은 무주봉화로, 진안 봉화산은 금산봉화로, 완주 봉수대산은 완주봉화로, 임실 봉화산은 임실봉화로가 경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 봉화산은 진안봉화로의 종착지이다.

이렇게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봉화산은 6개소에 달한다. 누가 언제 봉화대를 쌓고 운영했는지 문헌이 없어 도무지 알 수 없었는데, 요사이 가야사 국정과제로 그 실체가 드러났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옛길이 통과했던 말티재 서쪽 산봉우리가 임실 봉화산이다. 지명으로도 봉화대가 자리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전라북도와 임실군에서 발굴비를 지원해 주어 시(발)굴이 이루어져 임실 봉화산의 전모가 일목요연하게 파악됐다.

2000년대 초 군산대학교 고고학팀 지표조사로 임실 봉화산이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가야 봉화 찾기 프로젝트 일환이었다. 봉화산 정상부에 흙으로 쌓은 길이 8m 내외의 장방형 토단(土壇)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2017년부터 봉화산의 역사적인 성격을 밝히기 위한 시(발)굴이 시작됐다. 모두 세 차례의 전주문화유산연구원의 시(발)굴로 그 의미가 장수군 일대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봉화 왕국 반파국 봉화대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봉화산 정상부가 아닌 약간 남쪽 기슭에 봉화대가 터를 잡았다. 자연 암반층을 평탄하게 다듬어 봉화대가 마련됐는데, 봉화대는 조선시대 무덤을 만들면서 일부 훼손됐다. 당시 흙으로 봉화대를 만들 때 세운 기둥자리와 불을 피우던 발화시설이 확인됐다. 발화시설은 앞쪽이 둥글고 뒤쪽이 네모진 모양으로 그 평면 형태가 진안 서비산 봉화대와 거의 일치한다. 발화시설의 바닥면이 붉게 산화되어 얼마간 봉화대가 운영됐음을 뒷받침해 주었다.

유물은 반파국에서 만든 가야토기만 출토됐다. 말하자면 청자와 백제가 출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두 두 점의 뚜껑은 그 중앙에 중산모자형 꼭지가 붙어있다. 몸통부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제작기법이 거칠고 조잡하며, 태토는 검은색을 띠는 굵은 모래가 포함되어 있다. 반파국 지배자와 백성들이 잠든 장수 동촌리·삼봉리·삼고리 고분군 출토품과 그 속성이 똑같다. 일본 고분시대에 널리 유행했던 스에끼 뚜껑편이 섞여있어 더욱 큰 관심을 끌었다.

장수군 등 금강 최상류에 지역적인 기반을 둔 봉화 왕국 반파국은 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토기를 손수 만들기 시작한다. 마한과 백제, 신라, 가야의 최상급 토기를 거의 다 모아 ‘삼국시대 명품 토기박물관’을 만든 반파국이 아니었던가? 그러다가 불현듯 가야토기를 직접 만든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아무래도 전북 동부지역 삼국의 역학 관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최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던 반파국은 백제 영역으로 진출을 강행한다. 475년 공주로 도읍을 옮긴 백제가 꽤 오랫동안 정치적인 불안에 빠졌기 때문이다. 안타깝게 반파국이 백제의 국난을 함께 나누지 않고 고대국가 백제, 신라에 대항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택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반파국이 고립무원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빌미가 됐다.

봉화 왕국 반파국과 백제의 갈등은 급기야 전쟁으로 이어졌다. 두 나라는 513년부터 515년까지 기문, 대사의 소유권을 두고 3년 동안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기문은 운봉고원을 무대로 철의 왕국으로 융성했던 기문국이다. ‘일본서기’에 3년 전쟁이 한창이던 514년 반파국이 산성 및 봉화대를 쌓아 전쟁을 치른 것으로 전한다. 임실 봉화산은 3년 전쟁을 치를 때 쌓은 봉화대로 반파국이 봉후(화)제로 백제에 맞섰음을 알 수 있다.

반파국이 고대국가 백제, 신라와 맞선 이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철의 생산과 유통을 기반으로 한 반파국의 교역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당시 최고급 철을 중심으로 한 물물교환이 중단됨으로써 반파국 철의 장인들이 토기를 직접 생산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겨우 가야토기를 모방하여 흉내 낼 정도의 수준이어서 가야토기가 대부분 조잡하다. 임실 봉화산 봉화대에서 나온 가야토기도 당시 반파국에서 직접 만든 것들이다.

이제 막 시(발)굴을 통해 그 속살을 조금씩 드러낸 봉화 왕국 반파국 봉화대의 역사적인 의미를 밝히기 위한 첫 학술회의가 11월 임실군 지원으로 열린다. 향후 학술회의 성과를 토대로 문화재 지정 및 정비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110여 개소 반파국 봉화대의 역사성을 규명하기 위한 학제 간 융복합 연구가 조속히 시작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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