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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교수의 전북문화재이야기]정려각과 정려비

“효와 충을 실천한 사람들의 표상인 정려각과 정려비에서 21세기 효행의 길을 찾자”

기사 작성:  새전북신문
- 2020년 10월 27일 14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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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연(서예가,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초빙교수)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지켜야 할 덕목 가운데 효(孝)·충(忠) 등을 장려하고, 이를 시각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여 본받게 하므로서 이상적인 유교 사회를 만들고자 하였다. 따라서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 대해 정확한 실상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방의 수령들에게 명했으며, 수령과 향교의 유학자들, 혹은 해당되는 집안에서 신청을 하면 예조에서 심사하여 왕에게 올리고, 최종적으로 왕이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이러한 정려는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도 부른다. 정려를 받는다는 것은 사족(士族)의 경우는 가문의 영광 뿐만아니라 그 고을의 큰 경사였으며, 당사자와 가족에게는 벼슬을 내리거나 세금과 군역을 면제해주거나 면천하여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하는 등 혜택이 주어졌으므로 효충의 열기는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정려를 처음 세웠던 시기는 신라 때부터였으나, 고려를 거쳐 조선에 와서는 삼강과 오륜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풍속 교화를 위하여 효·충·열의 행적이 있는 자에게 사회적 신분의 고하, 귀천, 남녀를 막론하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정표하였다. 조선 초기의 정려정책은 고려시대의 충신·효자·순손(順孫)·의부(義夫)·절부(節婦) 등에 대한 정려정책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래서 역대 왕들은 즉위하면 반드시 이들에 대해 각 지방에서 보고를 하도록 하여 그 대상자는 문려(門閭)를 세웠다.

따라서 국가에서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려문(旌閭門)과 정려각(旌閭閣), 정려비(旌閭碑)를 세워 교화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마을 입구에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되며, 비문으로 세워진 것은 정려비라고 한다. 정려문은 충신, 효자, 효부,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정려기(旌閭記)를 게시한 문을 지칭한다. 정려각은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하고, 정려비는 이들의 충렬과 효행을 상세히 비문으로 새겨서 마을입구에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충효정신을 상징하며 수백년동안 마을을 지키고 있는 정려에 대한 유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는 경우는 매우 미미하며 전북 또한 6건에 불과하다, 전북문화재지정으로는 정려문은 없고, 정려각은 5건, 정려비는 1건 만이 있을 뿐이며, 대부분은 비지정문화재로 남아 있다.

정려각으로서의 문화재로는 정읍시의 ‘언양김씨삼강정려’(1632,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9호), 장수군의 ‘절렬양정씨지려’(1723,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 전주시의 ‘충신이흥발지려’(1753,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8호), 순창군의 ‘고려직제학양수생처열부이씨려’(1774,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2호), 남원시의 ‘양대박부자충의문’(1796,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0호)이 있으며, 정려비로는 임실군의 ‘김복규.김기종효자정려비및정판’(1885,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4호)이 있으며, 이 비문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예서로 쓴 글씨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명에 의해 수여된 정려도 많았으나, 때로는 가문에서 세운 열녀문, 효자각, 열녀비, 효열각, 충효문, 절행각 등도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절행각으로는 익산시 성당면의 ‘절부숙인남원윤씨절행각’이 있는데, 이는 유계(俞棨, 1607~1664)의 며느리 효행을 기리는 문장을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짓고 남원윤씨 가문에서 세웠으나 비지정문화재로 남아 있어서 안타깝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국가가 인정한 정표자들의 사례는 마을입구에 세워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미풍양속을 조장하는데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유교적 인간상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곳곳에 많이 남아 있는 이러한 충효의 산물인 정려에 관한 문화재들이 전수조사조차도 되어 있지 않으며, 국가지정은 없는 상태에서 소수만이 시도 유형문화재, 문화재자료, 민속문화재 등으로 지정되어 있으니, 빠른 보존수복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효와 충은 시대를 불문하고 본받아야할 중요한 덕목이다. 따라서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이러한 정려문과 정려비 문화재의 편액과 비문의 번역을 통해 이들의 행적을 본받을 수 있도록 장려하는 정책과 문화재 지정이 필요하며, 정려각의 시기별 건축양식에 관한 연구 또한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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